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오항녕 지음/너머북스/372쪽/1만7000원
선인은 이미 죽어 진토가 되었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담론의 장터를 펼친다. 때로는 이 담론이, 때로는 저 담론이 우세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도 광해군은 장터의 열기를 뜨겁게 달군 ‘문제적 인간’이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왕위를 강제로 빼앗긴 단 두 명의 왕에 속한다.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평가에는 큰 이견이 없다.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성정이 흐려졌다는 ‘동정론’도 있지만, 그래도 그가 왕으로서 수행해야할 내치와 외치에 모두 무능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광해군은 조금 다르다. 실록에 ‘혼군’(昏君·판단이 흐린 임금)이라 적혔던 임금이지만, 20세기 들어서 그에 대한 평가엔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 간사로 활동했던 이나바 이와키치가 그 주역이라고 봤다. 이나바는 광해군이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들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며 그의 폐위를 ‘비극’으로 평가했다. 인조 반정에 대한 사관의 반정이라 할만한 이러한 해석은 남·북한 모두에서 맥이 이어졌다. 북한에선 “광해군과 정부 안의 일부 관리들은 명나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에 치우치지도 말며 녀진을 홀대하지도 말고 그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립장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정세를 어느 정도 옳게 인식한 데서 나온 주장이었다”(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조선전사>)고 했다. 한국에선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정책으로 대처하였다”(교학사, <고등학교 국사>)고 가르쳤다.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에 대한 관점을 재복원하고자 한다. 광해군은 “본보기가 될 거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망칠 위험한 거울”이라는 것이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광해군 재위 시절의 실정을 상세히 살핀다.
광해군의 즉위는 초반부터 불길했다. 왕이 되자마자 광해군이 한 일은 친형 임해군을 반역자로 몰아 처벌하는 것이었다. 서열상으로는 장자인 임해군이 왕위에 올라야 마땅하나,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해 선왕인 선조가 살아있을 때도 후계자 논의에서 아예 배제된 상태였다. 선조는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의 혼란을 우려해 “동기(同氣)를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임해군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탄핵이 시작됐고, 선조가 세상을 뜬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사건 조사가 시작돼 임해군은 곧바로 귀양 보내졌다.
임해군과 관계 있던 모든 사람이 고초를 당했다. 가족, 친구는 물론 임해군의 집에 밀가루를 납품하러 온 상인, 칼이나 말발굽을 만들어준 대장장이, 공연을 했던 광대도 잡혀왔다. 혹독한 추국 끝에 임해군이 반역을 꾀한 증거라며 몇 가지 무기들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조총 10자루, 활 50장 정도였다. 반역의 무기치고는 약소했고, 반역의 조직치고는 허술했지만 정통성을 확립하겠다고 마음먹은 즉위 초기 왕을 막을 이는 없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잡음이 나왔다. 명나라가 장자 대신 차자가 왕위에 오른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조선은 이를 조사하기 위해 입국한 명 사신에게 수만 냥의 은을 건네며 무마했다. 뇌물로 외교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임진년, 정유년의 왜란 당시 청병할 때에도 뇌물을 주지 않았던 조선 외교의 원칙이 이때 무너졌다.
백성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대동법을 도입하는데도 광해군은 주저했다. 일각에서는 광해군에게는 의지가 있었으나 양반들의 반대로 여의치 않았다고 보지만, 오항녕 교수는 광해군에게는 애초에 대동법을 강하게 추진할 마음이 없었다고 본다. 고을 단위로 현물 세금을 내게 했던 것을 경작지 단위로 쌀로 내게하는 것이 대동법의 핵심인데, 이는 부족한 현물을 백성 대신 구해주면서 그 수수료를 받아챙겼던 양반 지주들의 방납 커넥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광해군 당시의 좌의정인 기자헌은 바로 방납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을 곁에 둔 왕이 대동법 도입에 적극적일 리 없었다.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자는 해당 관청과 사간원의 수차례 청원에 대해 광해군은 “천천히 생각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광해군 5년 이후 대동법은 흐지부지됐다.
조선은 문치주의 사회였다. 이는 국가의 정책 방향을 두고 논의, 설득하는 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조선 문치주의는 국정에 앞서 준비하고 토론하는 경연, 정책 실행 과정에서 치열한 검증을 벌이는 언관, 정책이 실행된 뒤 평가하는 사관이라는 세 기둥에 의해 지탱됐다. 특히 경연은 고전의 뜻을 논하는 공부 자리이자, 이를 토대로 국정 방향을 정하는 국무회의 역할을 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과 장관들이 <국부론>, <자본>, <논어> 등을 놓고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은 경연, 언관, 사관 어느 것 하나에도 관심이 없었다. 선왕의 상을 마무리하고 정치를 시작하는 ‘졸곡’이 다가오자 비서실인 승정원은 왕에게 경연을 열자는 의견을 냈으나, 광해군은 “슬프고 괴로워 기력이 편치 않고 더위가 한창 극심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경연을 미루던 왕은 그 와중에도 반역자들을 심문하는데는 직접 나섰다. 광해군 시기 경연은 즉위 2년이 지나서야 처음 열렸다. 2년간 왕과 신하의 소통이 없었던 셈이다. 사관은 “어찌 그리 사람을 죽이는 일은 급히 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등한히 한단 말인가”라고 기록했다.
광해군의 결정적인 잘못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데 있다. 일본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군에 의해서든, 수도를 비운 왕실에 분노한 백성에 의해서든, 많은 궁궐이 불에 탔다. 그러므로 궁궐을 중건하겠다는 광해군의 의지에는 타당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전란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은 어쩔 것인가. 광해군은 새로 지은 창덕궁에는 “무슨 소리가 난다”며 들어가지 않았고, 또다시 창경궁을 수리하라고 명했다.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광해군은 기둥의 모양 하나하나까지 세세히 지시하고 간섭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결국 조정은 백성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추가 세금을 거뒀고 변방의 군량미까지 미리 빼썼다. 왕이 궁궐 증축에 매진하는 기색을 보이자 출세를 꿈꾸는 양반들은 자기 집 주춧돌을 빼 공사에 쓰도록 바쳤다. 죄를 지어 쫓겨난 전직 관리들에게 은이나 공사 자재를 받고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다. 당시 공사 자제를 추산하면,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 되는 철이 석 달간의 궁궐 공사에 사용됐다.
마지막으로 훗날 ‘중립외교’라 평가받기도 한 명나라 및 후금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청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강홍립이 지휘한 조선군은 명의 후방에서 적당히 싸운 뒤 항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군사 1만3000여명 중 9000명이 전사했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포로로 잡혀 강제로 농사를 지어야했다는 사실은 덜 알려졌다. 게다가 강홍립은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침략의 길잡이로 돌아왔다. 저자는 “궁궐 공사로 파병 준비와 전략이 전무한 상태에서 파병한 데다가 어설픈 기회주의적 투항으로 군사들만 잃고 만 졸전”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광해군 치세기가 ‘잃어버린 15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광해군을 복권시키는 사관이 서양식 근대주의 목적론에 물들었다는 사실이다. 광해군은 중세의 해체를 촉진할 수 있는 군주였는데, 인조 반정에 의해 그 기회가 무산되고 조선의 중세는 다시 늘어졌다는 것이다. 근대주의 역사학자들은 어느 사회나 근대로 갈 수밖에 없으며, 그곳은 자유, 평화, 인권이 보장되기에 바람직하기까지 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저자는 의심한다. 서구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양식, 구조가 작동하던 조선 사회가 서구식 근대 모델에 포섭되는가. 그리고 조선 사회를 근대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타당한가. 저자는 “근대주의자들의 사이비 보편사관과 조급증”을 지적하면서, 이 때문에 인조 이후 300년간 조선 인민의 자구 능력이 무시당했다고 본다. 조선 사람들은 중세를 지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광해군을 몰아냈고, “다시 일어서 하루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갔”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은 광해군과 조선 시대를 그 자체로 이해하길, 즉 내재적으로 접근하길 권한다.
광해군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대중문화 창작자들의 영감을 자극했다. 이병헌씨 주연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왕위 찬탈 세력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에 떨던 광해가 자신과 닮은 천민 하선을 왕의 대역으로 내세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민중적인 상식과 정의감을 가진 하선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대동법을 시행케하고, “백성들이 굶어죽는데 무슨 의리냐”며 명의 청병을 거부하려 한다. 광해군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영화적으로 재치있게 변주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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