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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문학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다. 일본의 사상가로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는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저서로 보인다. 책의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했다고 사사키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인데, 인류 역사의 혁명은 폭력이 아니라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고쳐 쓰는데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사사키는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서구의 여섯 가지 혁명을 언급하는데, 이는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논하는 것은 통상 '혁명'이라고 언급되지 않는 중세 해석자 혁명과 대혁명이다. 


먼저 대혁명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루터의 '개혁'은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었으므로 '혁명'이라고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고 잇는다. 대혁명이란 곧 '성서를 읽는 운동'을 말하는데, 루터가 당시의 타락한 기독교를 구원하기 위해 성서를 읽고 또 읽고,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게 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세울 수 있었다.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총수는 40종이었는데 루터와 그의 적대자들의 저술에 힘입어 1523년에는 498종에 이른다. 루터는 성서에 근거해 당시 세속 사회까지 지배하던 교회법까지 완전히 부정했다. 그래서 대혁명은 '법의 혁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혁명이 이어진다. 40세의 평범한 남자 무함마드는 어느날 이상한 꿈을 꾼 뒤 메카 인근 히라 산의 동굴에 틀어박혀 명상을 하다가 대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난다. 매우 현실적이게도, 무함마드는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미쳤다고 의심해 동굴에서 도망치는데, 아내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다시 동굴을 찾는다.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무함마드는 문맹이었음에도 말이다. 


루터의 '혁명'보다 생소한 것이 중세 해석자 혁명이다. 이는 '모든 유럽 혁명의 어머니'인 12세기의 법혁명을 뜻한다. 11세기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6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전 50권)이 발견된다. 이후 유럽은 그때까지 몰랐던 정치한 법 개념과 법률 용어를 입수한다. 사사키는 자신이 매우 크게 영향받은 피에르 르장드르를 인용해 국가의 본질은 폭력 기구 같은 것이 아닌,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방대한 법전을 해석한 중세 해석자들은 세례, 교육, 구빈, 혼인, 성범죄, 고아 과부 병자 노인의 보호 등을 통괄하는 '삶의 규칙'을 세웠다. "근대 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가능성을 믿는다. 이때의 문학이란 소설, 시 등의 좁은 의미가 아닌 글로 쓰여진 포괄적인 텍스트를 일컫는다. 그리고 '고작' 5000년 된 문학의 '종언'을 말하거나, '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3만년~7만년 된 회화, 무용, 음악 등에 대해 할 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멸망하리라고 믿는 종말론 역시 매우 유아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라고 일축한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문맹률은 90%였는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등은 나머지 10%를 상대로 승부해 이겼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쓰고 또 쓰는 것 뿐, 쓰지 않는다면 다른 할 일이라도 있느냐고 사사키는 쏘아붙인다. 



사사키 아타루('사상가'라는 직함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그러나 글을 읽으면 짐작이 가는 스타일)


그러므로 사사키 아타루에게 읽는다는 것은 엄중한 행위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저 글자를 훑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이다.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도 '읽다'는 것은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지독한 열광의 독서가이자 과도한 '문학'지상주의자인 사사키는, 아감벤에게는 "제발 부탁이니 사전 정도 찾아보는게 어떨까"라는 조롱을 던지고, 그 이름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근대문학의 종언'을 이야기한 가라타니 고진을 비판한다. "정보에 토실토실 살이 찌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비평가"와 "초라하게 자기 진영에 틀어박혀 비쩍 말라가는 전문가" 모두를 거부한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라는 질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정보에 대해 무지하지만 텍스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데는 자신감이 있음을 내비친다. 이 책은, 사사키 스스로의 표현을 원용하면 '벌거벗은 광기의 독서'를 권장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지나쳐 보이는 비장미가 부담스러울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독서의 자세, 나아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는 마련해준다. 그러므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