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박지성이 5월 14일 은퇴를 발표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축구를 시작한 지 24년만의 일이다. 지금 그의 나이는 33세. 박지성이 전성기를 보냈던 프리미어리그의 선수들을 살펴봐도 그의 은퇴가 이르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가 유력한 라이언 긱스는 박지성보다 8살 많고, 프랭크 램퍼드는 3살, 스티븐 제라드는 박지성보다 1살 많다. 특히 램퍼드와 제라드는 박지성이 마지막 한 해를 뛴 네덜란드 에레디비지 리그보다 훨씬 격렬한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 팀에서도 주전이고, 다가오는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뽑혔다.
박지성은 은퇴 이유를 '무릎'이라고 꼽았다. 나카타 히데토시처럼 "축구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은퇴하는 대신,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절실한 이유를 댄 것이다. 그는 "지난 2월부터 (은퇴에 대해) 생각해왔다. 더는 지속적으로 축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릎 상태가 다음 시즌을 버티기에 안 좋았다"고 말했다.
박지성의 무릎이 좋지 않다는 것은 진작에 알려져 있었다. 박지성은 PSV에인트호벤 시절인 2003년부터 무릎에 물이 차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번 시즌에도 한 게임을 뛰면 며칠을 쉬어야 할 정도였다. 박지성의 무릎이 그토록 빨리 닳아버린 것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박지성은 쉴 새 없이 뛰는 선수였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인 2009~2010 시즌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상대팀 에이스인 피를로를 밀착마크했다. 피를로가 어디를 가든 박지성이 따라다녔다. 이 게임의 목적은 공을 차는 것이 아니라 피를로를 따라다니며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이라는 듯했다. 피를로는 올해 출간된 자서전에서 당시 경기를 회상하며 박지성을 '맨유의 경비견'이었다고 표현했다. 조금 비하하는 뉘앙스이긴 했지만, 맨유의 감독 퍼거슨이 박지성에게 요구한 것이 바로 그 경비견 역할이었다. 그리고 그 플레이스타일이 박지성의 무릎을 갉아먹었다. 테크니션이었기에 박지성만큼 뛸 필요가 없던 피를로는 박지성보다 2살 많지만 여전히 빼어난 기량을 보인다.
사실 축구선수라면 누구도 이런 스타일의 플레이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최전방의 스트라이커나 팀의 플레이를 풀어가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주로 축구팬의 시선을 받는다. 마치 밴드에서 보컬이나 기타리스트의 인기가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정작 박지성은 "현란한 테크니션이 아니었던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내 장점은 당연히 활동량이었고 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최대한 부각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였다"는 말도 했다.
박지성의 플레이 스타일은 그 활약에 비해 해외의 축구팬들 사이에선 인기가 덜한 한 요인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감독이라면 누구나 이런 선수가 필요하다.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팀을 위해 헌신할줄 아는 조직원. 그것은 상명하복의 조직문화에 적응하라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대로 범죄에 가담하는 국가정보원 요원을 따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규칙을 지키는한, 스포츠에서 승리는 '선'이다. 선의 실현을 위해선 팀원들의 충성이 필요하다. 11명의 선수가 하이라이트에 나올법한 묘기를 선보인다해도, 이기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요즘 세상에 헌신, 충성 같은 가치를 강조하면 '시대착오'라는 이야기를 듣기 딱 좋겠지만, 어쩌면 바로 그러한 희소성 때문에 이 가치는 소중하다. 헌신과 충성이란 조직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윤리다. '나'라는 좁은 틀을 버리고 '우리'라는 큰 공동체에 들어가는 열쇠다. 박지성은 바로 그 희귀한 가치의 표본이었고, 그 가치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무릎을 바쳤다.
박지성은 오늘 기자회견에서 울지 않았다. 울기는커녕 특유의 담담한 표정에다가 때로 미소까지 지었다. 자신의 커리어를 이른 시기에 끝내면서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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