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0일 오후 9시 45분. 이란 영화 <씨민과 나데르, 별거>의 상영이 끝났고, 한국 예술영화 관객들의 메카와도 같았던 하이퍼텍 나다가 문을 닫았다. 객석을 가득 채운 120여명의 관객들 앞에는 평론가·감독 정성일과 이 영화관을 운영해온 김난숙 대표가 서 있었다. 김 대표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1995년 대학로에 동숭시네마텍이 개관했다. 같은 해 영화전문지 키노와 씨네21이 창간됐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프랑스문화원의 정기상영회, 수십 번 복사돼 배우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불법 비디오테이프에 의존하던 고전·예술영화팬들에게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김 대표는 “나 아니면 누가 봐주겠냐는 생각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보러갔다. 그런데 극장 바깥까지 줄이 늘어서 있었다”고 돌이켰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희생>, <안개 속의 풍경> 등 낯설고 어려운, 그러나 삶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영화들에 4만~5만명씩 관객이 몰렸다. 정성일은 “모든 편지들이 일제히 도착했다. 오랫동안 꿈꾸던 세상이 열린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시네필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 시대는 짧았다. 외환위기가 닥쳤다. 키노는 99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정성일은 “문화의 시대가 지나자 모두들 따분하다는 듯 장부를 챙겨 떠났다”고 비유했다.
동숭시네마텍은 당시 문화부가 인정한 예술영화전용관 1호였다. 입장료의 3%에 해당하는 문예진흥기금을 정부에 내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받았다. 프랑스의 누벨 바그 영화들, 독일 무성영화들, 김기영 감독의 영화들을 상영했던 동숭시네마텍이 2000년 문을 닫고, 같은 운영주체가 하이퍼텍 나다를 열었다. 나다는 당시 한국 다큐멘터리 흥행 기록을 세운 <우리 학교>,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 등을 상영했다. 매년 투표를 통해 좌석에 붙일 문화 인물을 뽑는 행사도 인기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좌석이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 좌석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정성일은 “서울 시내 각 (단관) 극장마다 아우라가 있었다. 멀티플렉스는 그 아우라를 쑥밭으로 만들었다”며 “극장에서 많은 영화 동지들을 만났지만, 메가박스, CGV에서 함께 영화본 이들이 동지라는 생각은 한 번도 든 적이 없다”고 했다.
나다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한때 1만명에 달했던 유료 회원은 300명선으로까지 줄었다.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매년 쌓이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손자를 보다 나왔다는 심기옥 회원은 “회원이지만 잘 오지 못했다. 그래도 지나갈 때마다 저 극장이 내 극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정성일은 “나다는 우리들의 방어선이었다. 하나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방어선은 더 안쪽으로 밀려들어온다. 우리 모두 영화의 역사에 유죄”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멀티플렉스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도 각자의 눈높이에서 ‘영상보석’을 발견했으면 좋겠다”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나다는 ‘정관’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훗날을 기약했지만, 미래는 밝지 않다. 리모델링된 나다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올 것 같다고 한다. 어느덧 밤 11시였다. 관객들은 인적 드문 대학로의 밤거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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