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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사는 여자,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레베카 스클루트 지음·김정한·김정부 옮김/문학동네/512쪽/1만8000원


1920년 8월 1일 미국 버지니아 주 로어노크의 작은 오두막에서 태어난 헨리에타 랙스는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았다. 헨리에타가 4살 때 그녀의 어머니는 열 번 째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떴고, 헨리에타는 곧 할아버지네 집에 맡겨졌다. 어린 시절부터 우유 짜기, 닭 모이 주기, 담배잎 따기 등의 노동을 했던 헨리에타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 마치고 학교를 그만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촌과 자연스럽게 몸을 섞은 헨리에타는 열네살 때 첫 아들 로런스를 낳았고, 그 이후로도 2명의 아들, 2명의 딸을 더 낳았다. 1951년 헨리에타는 자궁에 혹이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근에서 흑인을 치료해준 유일한 대형병원인 존스홉킨스 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애초엔 남편이 어딘가에서 옮아온 성병 때문에 아픈줄 알았던 헨리에타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과는 좋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라듐 치료, 방사선 치료 모두 효과가 없었다. 8월에는 아예 입원을 했는데, 진통제로도 통증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헨리에타는 10월 4일 오전 12시 15분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헨리에타의 시신은 고향의 가족 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다소 일찍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헨리에타의 삶이 논픽션으로 쓰여져 전세계 25개국에서 출간되고, 유선 방송사 HBO의 영화로도 제작중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헨리에타의 일부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기는커녕 5000만t으로 늘어나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은 이렇다. 당시 존스홉킨스의 산부인과 과장 리처드 웨슬리 테린드는 자궁경부암의 권위자였다. 자궁경부암과 관련해 새로운 학설을 내놓은 그는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 시절 많은 의사들처럼, 테린드 역시 환자에게 알리지 않고 그들을 임상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따로 마련된 ‘흑인 병동’에서 무료로 치료받고 있던 흑인 환자들은 실험을 위한 무궁무진한 ‘재료’로 취급받았다. 헨리에타가 존스홉킨스를 찾아간 날, 담당 의사는 헨리에타의 자궁경부에서 작은 동전만한 조직 두 개를 떼어내 유리접시에 담았다. 테린드는 그 조직을 존스홉킨스의 조직배양 연구 책임자였던 조지와 마거릿 가이 부부에게 보냈다. 헨리에타에게 조직을 기증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본 이는 물론 없었다.  

가이 연구실의 연구보조원 메리 쿠비체크는 헨리에타의 조직 샘플을 건성으로 받았다. 혈액, 태반, 종양샘플, 죽은 쥐가 가득찬 연구실의 쿠비체크는 지쳐 있었다. 이전까지 쿠비체크가 배양하려 했던 세포는 모두 죽어나갔다. 세포가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무엇인지, 배양액엔 무엇이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맨땅에 헤딩’ 같은 작업이었다. 쿠비체크가 헨리에타의 샘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헨리에타의 세포들을 죽지 않고 살았다. 단지 산 것이 아니라 놀라운 속도로 자랐다. 24시간마다 세포 수는 두 배로 불어났다. 헨리에타 랙스(Henrietta Lacks)의 이름과 성에서 첫 음절을 따 ‘헬라’(HeLa)라고 이름붙여진 이 세포는 ‘역사상 최초의 죽지 않는 인간세포’였다. 헬라 세포는 미국 전역은 물론 인도, 네덜란드, 칠레 등으로 퍼져나가 살아있는 원숭이 대신 의학 실험, 신약 개발에 사용됐다. 그리고 소아마비 백신, 항암 치료제, 에이즈 치료제 개발, 파킨슨 병 연구, 시험관 아기의 탄생, 유전자 지도의 구축 등에 도움이 됐다. 과학자들은 원자 폭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헬라 세포를 핵폭탄과 함께 터뜨렸으며, 우주에서의 세포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우주선에서도 실었다. 인류가 과학을 연구하는 한, 헨리에타 랙스의 일부는 ‘불멸’이다. 


헨리에타 랙스의 몇 안되는 남은 사진


문제는 헨리에타의 가족들이 이같은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1973년, 볼티모어 시립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던 헨리에타의 큰 며느리 보벳은 친구네 집에서 그녀의 형부와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눴다. 친구의 형부는 국립암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보벳은 자신의 성(姓)이 랙스라고 밝혔고, 친구의 형부는 자신이 헨리에타 랙스라는 여자에게서 온 세포로 몇 년째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벳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22년전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세포가 실험실에 살아남아 있다니. 난데없는 소식을 들은 시아버지, 즉 헬리에타의 남편은 생각했다. 내가 장례식에서 시신을 확인했는데, 그들이 다시 가서 파냈다는 말인가. 아니면 부검 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미국엔 흑인을 대상으로 한 악명 높은 의학 연구 사례가 여럿 있다. 1930년대 터스키기 대학의 연구원들은 매독을 앓는 흑인 남성 수백 명을 모집했다. 매독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 관찰할 목적이었다. 가난하고 못배운 흑인들은 무료 건강검진, 따뜻한 식사, 교통비, 본인 사망시 유족들에게 지급되는 50달러의 장례보조비 등을 받고 실험에 응했다. 연구진은 페니실린이 이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실험을 계속했다. 연구자들은 흑인이 “지독스럽게 매독에 찌든 인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주요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헨리에타 뿐 아니라 그의 큰 딸 엘시도 흑인에 대한 편견과 부당한 의학적 대우의 희생자였다. 아름답고 섬세했던 소녀 엘시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저능아’ 판정을 받은 엘시를 기독교 부흥 집회에 데려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동생들이 태어나자 주변에서는 엘시를 ‘흑인 정신병원’에 보내라고 권했다. “흑인을 치료할 자금이 충분치 않았”던 당시, 이 병원은 사망률이 퇴원율보다 훨씬 높았다. 온갖 질병에 걸린 흑인 성인 남녀, 아이들이 창문도 없는 지하실에 수용됐다. 엘시는 그곳에서 열 다섯 살에 죽었다. 엘시의 형제 자매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청력 이상이 있고, 엘시 역시 청력 이상 때문에 말을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부질 없었다. 

사정이 이러니 흑인 민중 사이에 ‘도시 괴담’이 퍼지는 것도 당연했다. 19세기부터 흑인들 사이에는 연구 목적으로 흑인을 납치한다는 ‘심야 의사’ 이야기가 전해졌다. ‘심야 의사’ 괴담은 흑인 노예들의 야반도주를 막으려고 백인 농장주들이 퍼트리기도 했지만, 실제 많은 의사들이 노예를 대상으로 신약, 새 수술법을 시험했다. 백만장자 좁스 홉킨스가 1873년 기부한 700만 달러로 설립한 존스 홉킨스 병원 역시 기부자의 의도와 상관 없이 흑인들의 괴담 속에 오르내렸다. “존홉킨스는 흑인들한테 실험하는 걸로 아주 유명했어. 길거리에서 그냥 잡아가기도 했다등만.” 헨리에타의 둘째 아들 소니의 말이다. 

뒤에선 궁시렁대며 욕을 해도, 거대한 병원 문턱을 넘은 흑인들이 권위 있는 백색 가운의 의사에게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기는 힘들었다. 인종차별은 명목상 없어졌지만 사실상 남아있었다. 유색인종이 드나드는 건물, 버스가 따로 있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연구자들은 훗날 추가 연구를 위해 헨리에타 가족들의 피를 뽑았다. 연구자들은 ‘HLA표식자’니 ‘불멸의 세포’니 하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채혈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고 하지만, 학교라고는 평생 4년 다닌 것이 전부인 사람이 그 말뜻을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헨리에타 가족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채 “예”를 반복하며 피를 내줬다. 

뒤늦게 각성한 연구진이 일부 있었다. 그들이 실험실에 가져가 연구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헬라 세포를 처음 배양한 연구보조원 쿠비체크는 헨리에타를 암 조직 세포로 먼저, 시신으로 뒤늦게 만났다. 지하 시체실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오른 헨리에타의 발끝. 군데군데 벗겨지긴 했지만 여전히 선명했던 선홍색 매니큐어. 쿠비체크는 훗날 회상했다. “그 발톱을 보았을 때 거의 기절할 뻔했어요. 생각했죠. 어머나, 정말 사람이구나. 나는 헨리에타가 욕실에 앉아 발톱에 정성껏 매니큐어를 바르는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어요. 바로 그떄 우리가 지금껏 배양해서 전 세계로 보낸 그 세포들이 살아 숨쉬는 한 여자한테서 온 거란 걸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헨리에타의 살아남은 유일한 딸, 데버러의 이야기가 극적이다. 초짜 저술가였던 저자는 데버러의 협조를 받아, 가끔 방해를 이기며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을 쓸 수 있었다. 데버러는 “엄마 세포가 의학에 그렇게 많은 것을 했다는디 어째서 우리 식구들은 병원에도 맘 놓고 갈 수가 없는가.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니께요. 우리는 누군가 엄마 세포를 갖고 갔다는 것도 생판 몰랐는디, 사람들은 엄마를 이용해서 부자가 됐다잖어요”라고 말했다. 

데버러는 저자와 동행해 2001년 존스홉킨스 실험실로 향한다. 친절한 연구원은 붉은 액체가 가득든 3㎝ 크기의 플라스틱 시험관 수천 개를 가리키며 “여기 어머님의 세포가 가득 들어차 있어요”라고 말했다. 돌이 갓 지나 엄마와 사별한 데버러는 감탄했다. “세상에. 현미경으로 엄마를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라우” 

데버러의 사촌 개리는 헨리에타의 ‘불멸’을 성경에 기대 해석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노라.” 한 줌의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 가난한 사람들에겐 “하나님이 헨리에타를 천사로 선택해서 불멸의 세포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헬라가 ‘비전형적인 조직학적 소견’과 ‘특이한 악성행태’를 보인다는 의학적 소견보다 그럴듯했다. 

데버러는 200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가족들은 그의 머리카락을 한 줌 잘라 성경책 갈피에 넣었다. 엄마 헨리에타, 언니 엘시의 머리카락이 보관된 바로 그 성경책이었다. 헬라 세포는 지금도 세계 곳곳의 실험실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세포주의 하나다. 


분열하고 있는 헬라 세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