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를 가진 컨테이너 터미널인 홍콩 콰이충 터미널에 들어서고 있는 페가서스. /워크룸 프레스 제공
페가서스 10000마일
이영준 지음/워크룸 프레스/320쪽/2만원
엘리베이터로 고층건물을 오르내리고,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스마트폰으로 친구와 통화하고, 거실의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를 본다. 현대인은 이렇게 기계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기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은 드물다. 인간은 무엇이고 기계는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를 둘러싼 자연이란 또 무엇인가.
이영준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51)는 ‘기계비평가’다. 한국에서 스스로를 기계비평가라고 부르는 이는 이영준씨가 유일하다. 그는 기계의 구조를 연구하고 거기에 얽힌 의미를 밝히려 한다. 이영준씨가 이번에 연구한 기계는 ‘CMA CGM 페가서스’라는 이름의 컨테이너선이다.
프랑스 해운회사인 CMA CGM 소속의 페가서스는 인간이 만든 가장 큰 기계 축에 든다. 길이 363m, 높이 65m에 재화중량이 13만t이다. 페가서스는 무게와 크기에 비해 빠른 편인데 순항속도 24노트(시속 44.4㎞), 최대속도 26노트(시속 48.1㎞)에 이른다. 6000여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페가서스는 2009년 울산의 현대중공업에서 건조됐다. 지금 전세계를 누비는 대형 선박의 50% 이상은 한국의 조선소에서 만들어졌다. 이영준씨는 5년간의 수소문과 수없는 거절 끝에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페가서스에 올라 중국 상하이에서 영국 사우샘프턴까지 한 달간의 여정에 나섰다.
배에 오른 뒤 제일 먼저 떠올릴법한 질문은 ‘인간은 왜 바다로 나갔는가’이다. 물론 많은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 배를 탔다. 어부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 가족을 먹여 살렸고, 탐험가들은 바다 너머 이국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보물을 찾아 나섰다. 땅에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거센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그런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다일까. 독일어에는 ‘Fernweh’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향수(Heimweh)와 반대되는 뜻으로, ‘먼 곳에의 그리움’ 정도로 번역된다. 인간은 집을 그리워하는 욕구 뿐 아니라 먼 곳으로 떠나고픈 욕구도 있다. ‘현대인들의 삭막한 일상’ 같은 관용적 표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여기말고 어디라도’ 떠나고픈 마음을 오래전부터 간직해왔다. 그런 여행의 끝에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수평선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나서게 한 충동은 현실적인 계산이 아니라 막연한 판타지였다.
컨테이너선 브리지 윙 위의 선장과 도선사. 참 작다. /워크룸 프레스 제공
바다와 항해에 대한 상념에 젖어있던 저자는 곧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게 거대한 기계에 대한 매혹을 이야기한다. 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눈이 누리는 복’이란 뜻의 안복(眼福)이란 말이 있다고 하는데, 좋은 그림이나 글씨를 보고 마음이 풍족해지고 감흥을 받을 때 쓴다. 좀처럼 접하기 힘드었던 대형 기계의 모습은 기계비평가에게 안복을 안겨줬다. 페가서스는 너무나 커서 그 위에 타고 있으면 한 눈에 볼 방법이 없지만, 그럼에도 비평가는 배 구석구석을 누비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배는 ‘강철로 된 조각 작품의 거대한 갤러리’이며, 항구에선 크레인, 배, 트럭의 ‘조화로운 불협화음’이 들린다. 컨테이너 터미널의 소리는 리듬, 박자, 음정이 없이 불규칙하지만, 비평가는 그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느라 내는 소리들의 오케스트라’를 듣는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철의 풍경 속에서 저자는 미(美)를 넘어선 숭고를 느낀다. ‘유한’을 대상으로 하는 미가 인간적이라면, ‘무한’을 대상으로 하는 숭고는 비인간 혹은 초인간적이다. 1t의 무게도 가늠하기 힘든데, 13만t이란 얼마만한 무게인가. 디지털 카메라와 HD급 캠코더를 들고 배에 오른 저자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을 나무 뒤에 숨어서 찍는 비디오 카메라맨처럼”, “강철과 강철이 목숨을 건 맹수들의 싸움처럼 부딪히며 포효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오래전의 인간은 나무, 산, 강에서 숭고를 느꼈지만, 현대의 비평가는 오직 강철로만 된 삭막한 풍경에서 초현실적 숭고를 맛본다.
페가서스는 거대한 기계이자 ‘섬세한 괴물’이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20여명의 인간이 있다. 강철 더미 사이에서 최소한의 필요만 충족시킨 채 살아가는 인간 이야기는 어떨까. 선원들은 세상에 바닷사람과 바닷사람이 아닌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말한다. 바닷사람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 거친 파도가 치는 바다가 그들의 고항이다. 진정한 뱃사람은 “일생을 거친 바다에서 살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익과 손실 사이에서, 명예와 치욕 사이에서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고 자기가 내린 결정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행동해왔다.” 때로 바다가 횡포를 부리고 기계가 말을 듣지 않을지언정, 뱃사람은 운명을 스스로 만든다고 믿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기상 조건 속에서 선장은 “태양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태양을 얻었다”고 말한다.
뱃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하면서 실질적인 문화를 고수한다. 페가서스의 크로아티아인 선장 다미르 후버는 ‘휸다이’라고 발음한다. 저자는 이를 ‘현대’라고 고쳐주지 못한다. 선장은 한국의 대기업을 이국의 추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깊게 영향을 주는 실제로서 수십 년간 받아들여왔다. 이 발음이 틀렸다고 말할 권리가 저자에겐 없다.
전설 속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뱃사람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위험한 바다에서 살아 돌아와야 했던 한 선장이 악마와 계약을 맺어 안전하게 돌아온 대신, 그 대가로 최후의 심판일까지 바다 곳곳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는 이야기다. 뱃사람들은 그 어느 직군의 사람들보다 강하지만, 그 대신 불행에 빠질 위험도 많다.
“사람에게 아가미를 단다고 물고기가 되지 않듯이, 육지 사람을 배에 태운다고 바닷사람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육지 사람이었다. 바다를 한 달간 여행하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항해한 저자가 느낀 것은 의외로 우울이었다. 에머랄드 빛의 깊고 새파란 바닷물은 아름다웠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색은 똑같았다. 갈 곳 없는 배 위에서 맹장염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됐고, 같은 사람을 만나 같은 음식을 먹는 것도 지루함을 넘어 무기력을 안겨줬다. 대체 이 넒은 바다는 무엇이고, 거기서 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선장은 충고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가장 바보 같은 것입니다. 마음만 잘 다스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바다 한 가운데서 어쩌겠어요. 당장 지금의 항해를 즐겨요. 식탁에 놓인 푸딩을 먹어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목숨을 걸고 배를 띄웠던 대항해 시대와 달리, 오늘날의 바다에서 불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지구상의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려져 있고, 조류의 방향과 세기, 수심이 표기된 해도가 있다. ‘봉 보야지’(Bon Voyage)라는 기상예보 프로그램은 가고 싶은 진로를 대입하면 앞으로 24시간 후에 그 진로에 어떤 방향에서 어떤 세기로 바람과 파도가 닥칠지 예보해주는 ‘요술 상자’다. 옛날의 선원은 야채를 먹지 못해 괴혈병에 걸렸지만, 오늘날에는 조금 덜 신선할지언정 끼니마다 야채를 먹을 수 있다.
그래도 페가서스가 아무리 크다한들, 자연 앞에선 미세하다. 거대한 자연만큼은 대항해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페가서스는 상하이 양산항을 출발할 때부터 안개에 묶여 출항이 연기됐다. 산길은 여러 사람이 걸으면 평탄해지지만, 바닷길은 아무리 많은 배가 다녀도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에 휩쓸려 태평양을 떠돌다가 얼마전 캐나다 서부 해안에 도달한 뒤 미국 해안경비대의 함포사격을 받고 수장된 일본의 새우잡이 어선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을 현대로 가져온다.
저자는 “모든 것이 철저히 자동화되고 디지털화된 오늘날의 항해에서 탐험의 판타지가 어떻게 변형되어 남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페가서스를 탔다고 말한다. 사실 결론은 책의 서두에 이미 제시돼 있다. 인간은 대자연 앞에, 거대한 기계 앞에, 지위가 높은 인간 앞에서 3중으로 나약하다. 페가서스가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완전히 멈추는데 걸리는 시간은 16분. 그 사이엔 세상 그 무엇도 페가서스를 막아설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의 힘에 부치는 거대한 기계를 만들어놓고 그것과 힘겹게 투쟁중이다. 그렇다면 기계를 만들지 말아야 할까. 저자는 회고적·낭만적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항해를 계속해야 하는 모든 바닷사람들에게 항상 안전이 깃들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기계, 자연과 기묘한 삼각 관계를 맺고 있는 대부분의 현대인들 역시 저자처럼 때로 경탄하고 떄로 조마조마한 심경일 것이다.
비상용 드라이수트를 입은 저자. 겨울바다에 빠져도 체온을 한 시간은 유지해준다. 하지만 지상에선 이렇게 입고는 거의 움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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