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명세의 데뷔작 <개그맨>이 제작된 건 1988년이었다. 사회가 88올림픽의 여흥과 형식적 민주주의에 취한 사이, 영화는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 장선우의 <성공시대> 등 뉴웨이브 작품으로 자본주의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었았다. 이같은 상황 속의 <개그맨>은 어느모로 봐도 뜬금없는 영화였다. 스스로 천재 영화감독이 될 것이라 믿는 삼류 캬바레 개그맨, 영화배우가 꿈인 변두리 이발소 주인, 백수 아가씨가 총을 들고 강도짓을 벌이다 파멸한다. 그런데 이 모든 건 여름날 오후 이발소에 누워있던 개그맨의 꿈이다. 개그맨 역을 맡은 안성기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개그맨
23년이 흐르는 동안 영화감독 이명세는 8편의 장편 극영화를 내놓았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같은 흥행작도 있었지만, 많은 대중은 그의 어법을 대체로 낯설어했다. 특히 근래의 두 작품 <형사>(2005)와 <M>(2007)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관객들조차 난감해할 정도로 괴이한 구석이 있었다.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이명세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의 전작과 함께 <형사>와 <M>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도 상영된다. 전주에서 이명세를 만났다.
-특별전을 여는 소회는.
“해외에서도 여러 번 해서 처음엔 담담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의외로 너무나 재밌게 봤다고 말한다. 잃어버렸던 아이를 다시 찾은 느낌이랄까. 특별전 열면서 너무 큰 극장 잡지 말아달라고 영화제측에 요청했다. 사람 없으면 썰렁할까봐.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 나도 지인한테 표를 못 구해줄 지경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반응이 달라지는 것 같다.”
-23년간 8편이면 다작은 아니다.
“2년에 한 편 정도는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랬으면 지금 10편은 될텐데….”
이명세는 <인정사정…> 이후 4년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할리우드 진출을 도모했으나 작품에 대한 고집 때문에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고 알려졌으나, 정작 그는 CF를 찍으러 갔는데 당시 모델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제대로 찍지 못했고, 뉴욕에서 못 본 고전 영화를 챙겨보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4년간 ‘나홀로 대학’을 졸업했고, 영화를 찍자면 찍을 수도 있었으나 혼자 뛰기엔 쉽지 않아 그냥 귀국했다고 말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그 유명한 장면
-<인정사정…> 이후 <형사>가 나온 6년 사이, 세계관이나 영화관이 달라졌나.
“달라지지 않는다. 공고해질 뿐이다. 불가에선 뭔가 깨달으면 만행을 한다. 영화 만드는 것 자체가 만행이다. 흥행 결과를 떠나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영화제의 반응을 보면서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정사정…>은 대중과 평단과 작가의 세계관이 행복하게 맞아떨어진 경우였다. 그 정도 행보를 유지해야겠다는 계산은 없었나.
“위험한 생각이다. 이청준 선생 글 보면서 배운 건 ‘초심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성공에 기댄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늘 새롭고 다른 걸 해보고 싶다. 내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어야 한다.”
-<M>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매우 혹독했다. 흥행이 안되는걸 떠나 온갖 악성 댓글이 난무했다.
“당혹스럽긴 하지만 <개그맨> 때부터 훈련이 돼서….(웃음) 적당한 것보다 (찬반이) 확실히 찢어지는 것이 낫다. 그만큼 생명력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문제작 M
-<개그맨>과 <M>은 결국 꿈 이야기다. 꿈을 많이 꾸는가.
“물론. 꿈일기도 쓴다. 쉽게 잊는 꿈은 잡꿈, 개꿈이다. 칼 융이 ‘집단무의식’ 개념을 통해 말한 것처럼, 꿈이 내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다. 꿈 속에서 해답도 많이 찾았다.”
-당신이 데뷔 시절과 요즘의 한국영화 산업은 천지차이다.
“대기업이든 어디든 인연 닿으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예전엔 술 마시다가 의기투합해서 ‘가자’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요즘은 계속 커피 마시면서 비즈니스 해야 한다고 할까. 시대가 바뀌는 것이겠지.”
이명세는 또 한 번의 전회(轉回)를 준비중이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상업성이 뛰어난 영화들을 내놓고 있는 윤제균 감독의 JK필름과 함께 ‘한국판 007’을 준비하고 있다. 설경구가 주인공이며, 10월쯤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영화감독 되길 잘했나.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 내 (허름한) 옷차림이 중요하겠는가. 하고 싶은 일 속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겠는가. 그런 것 생각하면 나만 잘돼서 미안하기도 하고…. 난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 교도당’의 교주였다. 이제 마음 속으로 ‘잘된다면 갖고 갈 것도 아니니까 나눠주자’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는 ‘꼬불치고’ 나만 봤던 영화들도 나눠본다.(웃음) ‘나눠주자’고 마인드 컨트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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