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의 히트 상품-시선 너머

'시선' 시리즈는 인권위의 '히트 상품'이다. 계속 만들어졌으면 한다.

윤성현의 <바나나 쉐이크>, 강이관의 <이빨 두 개>(위로부터)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제작하는 ‘시선’ 시리즈는 ‘인권’과 ‘영화’의 훌륭한 협업 사례로 꼽힌다. 2003년 <여섯 개의 시선>으로 시작된 이 시리즈를 통해 인권에 대한 장·단편 극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선보였다. 지금까지 박찬욱, 박광수, 임순례, 류승완, 장진, 김태용 등 유명 감독들이 빠듯한 제작비를 감수하고 참여했다. ‘교육’과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온 ‘시선’ 시리즈는 영화가 돈만 좇는 매체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했다.

<시선 너머>는 그 여덟번째 시리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인 뒤, 28일 극장 개봉을 준비중이다. 강이관, 부지영, 김대승, 윤성현, 신동일 등 다섯 명의 감독들이 편당 평균 7000만원의 제작비로 만들었다. 총 3억5000만원인 셈이니 여느 상업영화 제작비의 10분의 1 수준이다.

강이관의 <이빨 두 개>와 윤성현의 <바나나 쉐이크>가 눈에 띈다. ‘인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영화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게 했다. ‘교육’이 궁극의 목표라 하더라도 영화는 ‘영화 자체’에 충실해야 그 목표도 이룰 수 있음을 이 두 편은 보여준다.  <이빨 두 개>는 복도에서 장난을 치다가 여학생이 들고 있던 야구방망이에 부딪혀 이빨 두 개가 부러진 중학생이 주인공이다. 알고보니 여학생은 탈북자 출신이다. 소년과 소녀 사이엔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을 정도의 우정이 싹트지만,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문제의 근원이다. <바나나 쉐이크>에는 이삿짐 센터 파트너인 한국인 봉주와 필리필 이주노동자 알빈이 등장한다. 이사를 끝낸 주인집 부부가 귀중품이 없어졌다며 항의를 하자, 늘 티격대격하던 봉주는 왠일인지 알빈을 옹호한다. <파수꾼>으로 연초 한국영화계를 놀라게한 신예 윤성현은 장편 데뷔작의 성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재확인시킨다.

<시선 너머> 다섯 편의 소재를 보면 현재 한국 인권의 취약지대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다섯 편 중 세 편(<이빨 두 개>, <니마>, <바나나 쉐이크>)에서 한국 사회 속 이방인(탈북자,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그렸다. 나머지 두 편(<백문백답>, <진실을 위하여>)에서는 도처에 설치된 폐쇄회로 티비(CCTV) 등을 통해 침해되는 개인정보 인권이 주요 소재다. 소재의 교집합도 있다. <니마>와 <진실을 위하여>에는 여성 환경미화 노동자가 주요 등장인물이고, <니마>와 <백분백답>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연대 혹은 고립을 묘사한다. 이들 영화에는 연기 경험이 없는 실제 탈북자와 이주노동자들이 출연했는데, 자신들의 문제를 다뤘기 때문인지 아마추어의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소재는 인권위와 각 감독들이 상의해 결정했다. 최근 농협이나 현대캐피탈 해킹 문제를 통해 다시 불거진 개인정보의 문제는 인권위가 먼저 제안했다. 일단 작품 방향이 정해지면 원칙적으로 감독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한다. 인권위 인권영화 담당 김민아씨는 “미리 논의하지도 않았는데 강이관, 부지영, 윤성현 감독은 각자 다른 디아스포라(이산)의 문제를 다뤘다”고 전했다.

앞으로도 ‘시선’ 시리즈가 계속 제작될 수 있을까. 영화 제작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제작비다. 매년 1억5000만원 정도의 예산을 타내곤 있지만, 이 정도로는 단편 2편 정도만 찍을 수 있는 수준이다. <시선 너머>에 묶인 다섯 편의 제작연도가 각기 다른 것도 예산이 나올 때마다 1~2편씩 나눠서 찍었기 때문이다. 다음 시리즈 제작비를 일부 충당하긴 했지만, 올해도 내년 제작비를 따내기 위해 지난한 ‘예산 투쟁’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김민아씨는 “오래된 시선 시리즈도 각 학교나 공동체에 보급된 DVD를 통해 지금까지 상영되면서 생활 속에서 인권을 생각하는 게기를 주고 있다”며 “(제작비 문제 때문에) 매번 만들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불편해도 괜찮아>의 저자인 김두식 경북대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토론거리가 무궁무진하면서도 굳이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재미있는 영화. 자녀들 논술학원에 보낼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이 영화를 함께 본 후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게 나을 듯”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