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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보이와 올드보이 이펙트



다큐멘터리 '올드 데이즈'를 계기로 '올드보이 이펙트'에 대해 썼다. 박찬욱 감독은 제 6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지 못했지만, '아가씨'는 곧 개봉한다. 



박찬욱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올드보이>는 2003년 11월 개봉했다.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와 함께 ‘복수 3부작’이라 불리는 이 영화는 전국 320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성적을 올렸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이듬해 5월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최초 상영을 원칙으로 하는 칸영화제 경쟁 부문이 개봉한 지 6개월 된 영화를 초청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심사위원단은 <올드보이>에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안겼다. 이후 박찬욱 감독은 2009년 심사위원상을 받은 <박쥐>에 이어 올해 <아가씨>까지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3회 진출하는 기록을 남겼다. 칸영화제는 영화의 상업성보다는 예술적 가치에 주목하는 영화제다. <올드보이>의 칸 초청은 상업영화로 시작한 <올드보이>가 예술성까지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박찬욱도 국내외에서 예술적·상업적으로 동시에 성공한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주 끝난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올드보이>의 제작 뒷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올드 데이즈>가 상영됐다. 이 영화에서는 <올드보이>에 참여했던 주요 배우, 스태프가 10여년 전 제작 상황을 회고한다. <올드보이> 제작진은 젊었다. 박찬욱, 주연 배우 최민식만 갓 40대에 접어들었을 뿐, 정정훈(촬영), 류성희(미술), 조상경(의상), 양길영(무술), 송종희(분장), 임승용(프로듀서) 등은 모두 30대 초·중반의 신예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한국영화의 주요 스태프이기는커녕, 영화를 계속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올드보이> 이후 이들은 각 분야의 주요 스태프로 자리 잡아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이끌었다. 




<올드보이>는 다양한 배우를 발굴하기도 했다. 강혜정은 오디션장 앞에 있는 일식집에서 회칼을 빌려오는 ‘성의’를 보인 끝에 미도 역에 캐스팅됐다. 연극배우 출신의 오달수는 <올드보이>에서 처음으로 대사 있는 역을 맡았다. 오늘날 한국영화의 주요 배우로 자리 잡은 오광록, 윤진서, 유연석, 김병옥 등도 <올드보이>를 통해 얼굴을 알렸다. 

<올드 데이즈>의 한선희 감독은 “현재 한국영화계는 경험을 중시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30대 초·중반 신인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구조가 됐다”며 “<올드보이>는 100여명의 스태프가 기이한 에너지로 똘똘 뭉쳐 만든 기적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 

2003년의 ‘수작’은 <올드보이>만이 아니었다. 영화주간지 씨네21이 그해 정기독자를 대상으로 뽑은 ‘올해의 영화’에서 <올드보이>는 5위에 올랐다. ‘한국영화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히는 <지구를 지켜라!>가 1위였고, <살인의 추억> <질투는 나의 힘> <바람난 가족>이 뒤를 이었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도 이때 나왔다. <올드보이>는 평지에 돌출한 수작이 아니라, 풍성한 한국영화의 숲 속에 자리한 영화였던 셈이다. 


2003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일단 2003년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진보 진영이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시기였다. 예술가들은 심의에 대한 걱정 없이 자유롭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계도 황금기였다. 1990년대를 거치며 다져온 산업의 시스템과 예술가의 창의성이 조화롭게 만난 시기였다. 이제 그런 시기는 ‘올드 데이즈’(옛 시절)가 됐다. <올드 데이즈>에 출연한 배우,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강혜정은 “우리 모두 미쳐 있었다”고 회고한다. 한국영화의 권력은 제작자, 배우를 거쳐 자본을 가진 대기업으로 이동했다. 멀티플렉스를 소유한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철저한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비슷비슷한 영화를 만든다. 한국영화 제작비가 상승함에 따라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영화 대신, 다수 대중의 취향에 맞는 안정적인 영화에 초점을 둔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올드보이>는 ‘상업적 아트영화’의 변곡점 같은 영화”라며 “한국영화계는 여전히 좋은 감독과 제작자를 배출하고 있지만, 대기업 투자·배급사는 더 이상 이들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고 장르적 규칙을 남발하는 평범한 영화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