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미친 남자들이 있었다. 한 명은 영화감독이었고, 한 명은 정치인이었다. 둘의 만남은 악연에 가까웠지만, 영화라는 공통분모로 통하는 점도 없지 않았다.
22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연출 로버트 캐넌·로스 아담)는 영화감독 신상옥(1926~2006)과 배우 최은희(90) 부부의 납북과 탈출 과정을 그린 영화다. 1978년 1월 홍콩으로 투자자를 만나러 갔던 최은희는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납치됐다. 8일간의 선박 여행 끝에 도착한 북한 남포항에는 김정일이 마중나와 있었다. 6개월 뒤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으로 갔던 신상옥 역시 납치돼 북한으로 향했다. 제공된 주택에 머물며 김정일과 함께 공연을 볼 정도로 비교적 편한 생활을 했던 최은희와 달리, 신상옥은 수용소에 감금돼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다.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던 최은희와 신상옥은 1983년 김정일이 주최한 파티장에서 재회했고, 이후 김정일의 파격적인 지원 아래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1986년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 북한 감시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미국 대사관에 진입했다.
다큐멘터리는 최은희와 그의 자녀들, 전직 미국 정보 장교, 홍콩 경찰, 영화평론가 등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의 전모를 밝힌다. 당시에는 ‘자진월북설’도 돌았으나, 영화는 이들이 납북됐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신상옥이 김정일과 대화할 때 목숨을 걸고 몰래 녹음한 육성 테이프에 그 전모가 담겼다. “(신 감독이) 자기 발로 자기 뜻대로 뜻을 가지고 (북으로) 오는 방법이 없나. 신 감독을 유인하려면 뭐가 필요한가. (…) 두 분이 꼭 필요하니까 데려와라(고 공작원들에게 말했다).” 김정일 스스로 신상옥의 납북을 지시했음을 시인한 것이다.
그러나 <연인과 독재자>는 북한의 독재나 개인 우상화 작업을 고발하는 데 전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 영화에 빠져 살았던 신상옥과 김정일의 캐릭터에 대한 흥미를 유발한다. 사후 발간된 신상옥 자서전 <난, 영화였다>에서 극작가 한운사는 신상옥을 “영화에 미친 놈”이라고 평했다. 그는 현장에서는 식사시간을 잊은 채 촬영하기 일쑤였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연출을 넘어 제작에까지 손을 댄 신상옥은 “너무 많이 만들다보니 우리 회사(신필림) 작품도 내 눈으로 다 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돌이켰다.
납북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상옥은 수용소를 몇 차례나 탈출했다. 영화 속에서 본 탈옥 장면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붙잡혀 갇힌 뒤에는 그동안 만들었던 영화들을 상상했다.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고치고 촬영하고 편집하면서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
김정일도 그에 못지않았다. <연인과 독재자> 속 김정일은 거대한 궁전 속에서 수많은 장난감에 둘러싸여 친구도 없이 성장한 인물로 묘사된다. 아버지 김일성처럼 정치인으로서 내뿜는 카리스마가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여겼다. 그가 특히 사랑한 예술은 영화였다.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이라는 책을 썼고, 전 세계 1만5000여편의 영화를 모았다. 그중에는 한국에서는 필름이 유실돼 볼 수 없는 이만희 감독의 걸작 <만추>도 있다.
영화에 대한 김정일의 애정은 신상옥·최은희 납치에서 절정에 달했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고의 영화인을 납치한다는 발상부터가 황당하다. 김정일은 북한의 반복적, 도식적인 영화에 염증을 느꼈다. 김정일은 신상옥 앞에서 북한 영화가 ‘상갓집’처럼 울기만 한다고, 그러면서도 북한 영화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 의욕이 없다고 비판했다. “예술대회(국제영화제)에 나갈 만한 작품이 없단 말입니다. (…) 그쪽(남한)은 대학생 수준인데 우린 이제 유치원이다.”
김정일은 신상옥의 영화 제작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 홍보도 강요하지 않았다. 동양 최대인 연건평 2만평 규모의 신필림 촬영소를 지어줬다.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 신필림 경영난 때문에 수년간 영화를 찍지 못했던 신상옥은 북에 가서 날개를 달았다. 신상옥이 북한에서 영화를 찍은 기간은 2년여에 불과했지만, 그사이 하루 2~3시간씩 자며 <소금> <불가사리> 등 7편을 연출했다. 북한 영화 최초의 해외 로케이션, 최초의 키스신도 신상옥의 영화였다.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대사도 전무하던 곳에서 춘향전을 뮤지컬로 각색한 <사랑 사랑 내 사랑>을 찍었다. 이 영화가 더욱 파격인 이유는 1960년대 중반 김일성이 “춘향전은 계급 간의 남녀 사랑을 취급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도움이 안되는 작품”이라는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탈출기> 촬영 때는 기차 폭파 장면을 찍겠다고 하니, 진짜 기차를 내줘 폭파하게 했다.
신필림 촬영소는 신상옥·최은희의 탈출 이후 완공돼 정작 이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김정일은 이후에도 북한영화 발전을 위해 지원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신상옥은 북한 시절에 대해 “다 싫은데 돈 걱정 안 하고 영화해서 좋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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