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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악당, 시시한 영화,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해


지난 여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시시하다고 느끼던 차에 가디언 기사를 읽고 엮어본 기획. 할리우드도 슬슬 대비책을 내놓아야 할 듯. 



때로 할리우드 영화 속 악당들은 주인공보다 더 매력있는 존재였다. 이들 악당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을 넘어, 우리 사회와 삶에 도사린 악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했다.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영화가 낳은 불세출의 인기 캐릭터로 남아 있다(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요즘 악당은 어떤가. 3일 개봉한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아예 슈퍼히어로 영화 속 악당들을 모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다. 할리퀸, 데드샷, 조커 등 배트맨의 숙적들이 한꺼번에 나온다. 배트맨은 카메오처럼 잠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팬들의 기대와 달리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다. 한국에서 20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는 등 흥행 수익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평단은 혹평 일색이다. 리뷰들을 모아 점수를 매기는 ‘로튼 토마토’에선 27%의 호감도만을 보이고 있다. “영화가 플롯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이 영화엔 잃어버릴 플롯조차 없다”(뉴요커), “악당 올스타 팀을 모아놓고는 뭘 해야 할지 모른다”(할리우드 리포터) 등의 평가가 나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디언은 ‘할리우드 악당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라는 최근 기사에서 ‘악당의 인간화’를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꼽았다. 악당의 악행에 인간적 의미를 부여하고 영웅과 악당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추세가 이어지면서, 기존 악당이 가지고 있던 ‘악마적 위엄’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위로부터 <수어사이드 스쿼드> <스타트렉 비욘드> <제이슨 본>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한 사례다. 데드샷(윌 스미스)은 백발백중의 살인 청부업자지만, 딸 앞에선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딸바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인 할리퀸(마고 로비)은 예측 불가능한 광인이지만, 연인 조커(자레드 레토)에게는 절대적인 사랑을 맹세한다. 심지어 이들이 팀을 이루는 이유조차 모호하다. 미국 비밀정보기관의 아만다 월러 국장은 초인적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선 또 다른 초인적 악당을 기용해야 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월러가 말하는 초인적 악당은 정보기관의 잘못된 판단이 초래한 결과였다. 존재하지 않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조직하고, 조직 과정에서 적이 생성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결국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악당으로 구성된 팀’이라는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적의 존재를 쥐어짜낸 셈이다.

악당들의 악의가 구태의연하다는 점도 문제다. 18일 개봉하는 <스타트렉 비욘드>와 지난달 개봉한 <제이슨 본>이 대표적이다. 거대 우주선 엔터프라이즈호의 커크 함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미지의 적의 공격을 받아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다. 엔터프라이즈호를 공격한 악당은 우주의 문명들이 서로 어울려 누리는 평화 상태를 종식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는 “갈등이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1990년대 소비에트의 해체와 냉전 종식에 불만을 품은 강경파 군인의 논리를 연상케 해, 2016년의 스크린에 구현되기엔 구시대적으로 보인다.

<제이슨 본>은 <본 얼티메이텀>(2007)으로 완결된 줄 알았던 ‘제이슨 본’ 시리즈의 재개를 알린 작품이다. 이번에도 제이슨 본은 자신을 훈련시켰던 미 중앙정보국(CIA)의 음모에 맞서는 동시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002~2007년 3편의 ‘제이슨 본’ 시리즈와 똑같은 적, 똑같은 동기다. CIA가 정보통신(IT) 거물과 손잡고 새 사생활 감시체계를 구축하려 한다는 점도 영화 소재로선 낯설지 않다. IT기술과 결합한 정보기관의 사생활 감시 문제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부터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4)까지 숱하게 다뤄졌다.

악당이 시시하니, 영웅의 투쟁도 시시해졌다. 결국 목적 없는 전투의 스펙터클만이 스크린을 채울 뿐이다. 가디언은 IS 같은 극단주의자, 도널드 트럼프 같은 선동가, 인터넷의 악플러 등 새로운 악당의 유형을 제시한 뒤, “현대 세계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공포를 제공하고 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완곡한 허구의 세계에 숨어 있을 수 없다”며 “이런 이유로 영화는 악당의 존재를 심층적으로 탐구하기를 꺼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