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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한국어, 사투라외 표준어는 평등하다,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

쉽고 재미있게 잘 읽힌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언어인 영어를 모국어로 삼은 저자가 '언어의 자유시장' 정도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니 다소 배알이 꼴리는 부분도 있다.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

로버트 레인 그린 지음·김한영 옮김/모멘토/498쪽/1만9000원


뼈째회, 늘찬배달, 누리사랑방, 교감지기, 똑똑전화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어원을 살피면 그 뜻이 짐작가는 것이 있기도 하고,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단어도 있다. 이 말들은 각각 세꼬시, 퀵서비스, 블로그, 솔 메이트, 스마트폰 등에 대해 국립국어원이 제시한 ‘순화어’다. 


아름다운 고유어를 널리 쓰이게 하겠다는 의도야 이해하지만, 언어는 언중에 의해 사용되어야 언어다. 순화어로 제시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주변에서 이 말을 사용하는 걸 들은 적이 없는 걸 보면, 국립국어원의 의도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부 누리꾼들은 ‘국립국어원’도 ‘나라세움우리말터’로 바꾸는게 좋겠다는 농담도 던진다. 


돌아보면 언어의 ‘타락’을 개탄하는 소리는 늘 있었다. 누군가는 상스러운 은어를 쓰며 낄낄대는 ‘요즘 애들’을 탓하고, 누군가는 어려운 외래어를 섞어 쓰는 ‘먹물들’을 비판한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의 문화를 동경해 그들의 말을 빌려오는 사대주의에 가슴을 치는 분위기도 있다.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원제 You are what you speak)를 보면 언어의 타락에 대한 분개하는 세력은 전세계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프랑스, 이스라엘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타락은 현대에 들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고대 로마의 문인 키케로는 사람들의 라틴어 지식이 “수치스러운” 수준이라고 일갈했다. 저자는 이들을 ‘잔소리꾼’이라고 묶어 버린다. 키케로나 이후 잔소리꾼들의 우려대로 고대부터 언어가 타락하고 쇠퇴했다면,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는 동물 울음과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 아닌가. 


잔소리꾼들이 지금 세상에 쓰이는 말들에서 ‘무능력’을 발견한다면,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기적’을 느낀다. 잔소리꾼이 언어에서 실수를 찾기 위해 귀를 세운다면, 저자는 흥미로운 변이를 본다. 물론 한 사회는 ‘표준어’를 갖고 있으며 이를 널리 쓰도록 장려한다. 하지만 저자는 “표준어는 우리가 명료하게 생각하고 기본적 품위를 지키도록 해주는 수단이 아니라 취업 면접이나 정치 연설, 에세이, 소설 등 우리 삶의 틀지어진 분야들에 접근하도록 해주는 규약이다. 표준어는 교육과 학식을 나타내는 징표이지 교육과 학식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온갖 은어와 방언과 문법적 오류들은 그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인식이라면 표준어는 ‘표준 방언’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언어의 힘이 막강하다는 인식은 고대부터 있었다. 기독교의 신은 자신에게 도전하려 바벨탑을 세우는 인간을 벌하기 위해 간단한 방법을 썼다. 성경이 이르는대로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손가락 하나 까닥해 인간들을 모두 죽이거나 바벨탑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테지만, 신은 그저 인간들의 말을 혼란케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했다. 언어는 바벨탑을 쌓을만한 인간의 힘이자 약점이다. 


언어는 신에게 도전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권을 탈환할만한 힘은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다. 그는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프레임설정’에 앞섰기에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본다. 공화당은 상속세를 ‘estate taxes’ 대신 ‘death taxes’(사망세)라고 부르기 시작함으로써, 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뜨리는데 성공했다. 레이코프는 민주당이 세금을 회비(membership dues) 개념으로 전환하는 등의 프레임 재구성을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바벨탑을 만든 이든 레이코프든, 언어가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 언어의 돌연변이, 훼손에 민감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워프주의’는 언어의 힘에 대한 또다른 가설이다. 이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으면 그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다고 믿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 ‘정’에 해당하는 말이 영어에는 없기에, 영국인들은 정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그린은 이런 생각들에 반대한다. 물론 언어는 힘이 세지만, 언어가 없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건 과장이라고 주장한다. 언어와 생각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미묘한 상호작용을 맺는다. 어떤 정서, 생각을 나타내는 하나의 어휘가 없다면, 여러 개의 어휘로 풀어 설명하면 된다. 언어는 변화하기에, 무언가를 말할 필요가 있으면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사실 엄격한 규칙을 세워 언어를 통제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키케로같은 잔소리꾼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누가 어떤 말을 쓰든 개의치 않았다. 아무 문제 없던 곳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건 시민 계급의 형성과 시기를 같이한다. 근대 서유럽 국가들은 “교육받은 시민 계급이 곧 국가의 힘”이라는 믿음 아래 언어에 대한 보편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민족국가의 출현은 언어의 ‘통일’을 가속화했다. 비교적 단일한 민족으로 구성됐으며 뚜렷한 국경선을 가진 국가들은 군대와 이를 지탱할 세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토지와 인구 정보를 담은 기록이 필요했다. 그래서 ‘표준 언어’가 권장되기 시작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언어 표준화는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진행됐지만, 이 과정을 수십 년간 압축적으로 진행한 나라도 있다. 바로 이스라엘이다. 전세계에 산재한 유대 민족들은 엄숙한 종교 의식을 치를 때만 히브리어를 사용하곤 했는데, 몇몇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히브리어를 살아있는 언어로 되살려냈다. 유대계 러시아인 엘리에제르 페를만은 이 사라져가는 언어를 되살려 부엌, 시장, 거리에서 사용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전통 히브리어 어근에서 현대에 어울리는 단어를 파생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큰아들을 키우며 다른 언어를 일절 접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였다. 이것은 “고대의 언어로 하여금 현대 민족주의에 봉사토록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언어를 통해 민족 형성을 추진하는 사업을 굳이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언어 표준화의 정치적 동기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언어 표준화는 선악의 싸움이 아니라 필요의 게임이다. 


모든 언어는 평등하다. ‘다른 언어보다 더 평등한’ 언어는 없다. 프랑스어는 법에, 독일어는 철학에, 이탈리아어는 노래에, 영어는 시에 적합하다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신화’다. 이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강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순전히 역사적 우연의 결과다. 이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과 그들의 민족국가가 융성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휘가 상대적으로 넉넉한 언어가 있다. 다른 언어와 접촉해 외래어를 많이 받아들이거나, 기술적인 어휘가 늘어난 경우다. 물리학, 화학 등의 현대 과학은 유럽, 북미에서 주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들 나라의 언어에 관련 어휘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언어의 타락에 대한 우려는 신경과민에 불과하다. 미국에선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히스패닉 인구가 늘어나면서 영어가 “위협받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이 “중력이 위협받고 있다거나 포크의 사용이 위협받고 있다는 얘기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이민 1세대는 당연히 스페인어를 선호하겠지만 2세대, 3세대로 갈수록 영어가 우세를 점한다. 한 사회 내의 하층민이 쓰는 언어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층어’들이 사회적으로 낮을 따름이지 언어적으로도 낮지는 않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컨대 미국의 흑인 영어는 무규칙하게 보이지만, 사실 정교한 문법에 의해 사용된다. “He sick”은 “그는 지금 아프다”지만 “He be sick”은 “그는 자주 아프다”는 뜻이다. 이렇게 규칙 없는 언어는 없고, 규칙은 늘 만들어진다. 언어학자는 기존의 규칙을 언중에 강요할 것이 아니라, 언어에 내재한 규칙을 발견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저자는 언어의 타락을 걱정하는 이들이 사실은 정치적·문화적 진보를 두려워하는 것 아닌지 의심한다. 미국의 작가 린 트러스는 한국에도 번역된 <먹고, 쏘고, 튄다>에서 올바른 문장부호 사용법을 재치있게 소개한다. 자유로웠던 6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트러스는 “다른 여자아이들이…꼴사납게 목에다 사랑의 물린 자국을 얻어가지고 올 동안” 문장 부호 사용법을 공부했다고 고백한다.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프리라이팅(글쓰기 규칙을 무시하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적는 것) 교육을 비판하는데, 속셈에는 진보적 교육운동에 대한 불편함이 묻어있다고 저자는 파악한다. 


언어는 구름과 같다. 구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치와 형태가 바뀐다. 여러 나라들이 경계를 접하고 사는 유럽을 떠올려보자.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접경에 사는 사람들은 때로 두 언어가 뒤섞인 말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잘못, 열등이 아니라 언어의 다양한 변이 과정이다. 좁은 땅에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산맥과 강과 길로 나뉜 경계를 지나면 어휘와 어조가 조금씩 바뀌어 가는 걸 느낀다. 방송으로 전달되는 서울 사람들의 ‘표준어’ 때문에 사투리들이 힘을 잃어가는 듯 보이지만, 사투리는 촌스러운 말이 아니라 한국어의 또다른 가능성이다. 평안도 사투리가 없는 백석의 시, 충청도 사투리가 없는 이문구의 소설, 표준어를 쓰는 4·3 영화 <지슬>이 무슨 재미일까. 


무엇보다, 정확한 문법을 지키지만 헛되거나 거짓된 말이 무슨 소용일까. 최고의 교열자들이 감수한 대통령의 연설보다, 70이 넘어 한글교실에서 배운 글로 삐뚤삐뚤 써내려간 할머니의 편지에서 우리는 더 많은 감동을 받곤 한다. 언어는 그렇게 살아 움직인다. 규범을 정한 자들의 손아귀를 미끌미끌하게 잘도 빠져나간다. 그 광경에 안타까워하지 말고 박수 치며 즐기자고 저자는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