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이번엔 사진에 대한 책 3권을 잇달아 읽었다.
시작은 제프 다이어의 <지속의 순간들>(사흘)이다. 영국의 작가 제프 다이어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번역되지) 않은 사람인데, 이 책을 읽어보면 뒤늦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유명한 보르헤스의 '어느 중국 백과사전' 분류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20세기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의 작품을 임의로 분류하고 해석한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임의'다. 누가 폴 스트랜드, 워커 에반스, 도로테아 랭, 안드레 케르테스, 다이앤 아버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을 작가별, 시대별이 아니라 눈먼 거지, 손, 벤치 등의 소재를 다루는 방식으로 분류해 해설할 생각을 했겠는가. 다이어는 자신의 영감 넘치는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물을 '황제에게 속하는 것' '인어들' '훌륭한 것' '낙타의 털로 만든 세밀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것들' 등으로 분류하는 보르헤스를 떡하니 인용하고 시작하는 거다.
윌리엄 게드니, 다이앤 아버스, 뉴욕, 1969. 미인 대회 참가자들을 찍는 아버스를 찍었다.
언급하는 모든 사진이 실려 있지는 않기에, 컴퓨터 앞에 앉아 해당 사진을 찾아보며 책을 읽어나가기도 했다. 사진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명확한 글쓰기는 존 버거나 수전 손택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이어는 존 버거의 <에세이 선집>의 편집자였다고 한다.
다이어의 글쓰기를 보고 생각난 또 하나의 비평가는, 사진과는 별로 관계 없는 일본인 하스미 시게이코다. 불문학자이자 도쿄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한 하스미 시게이코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영화평론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는데, 한국의 영화학도들이 한번쯤 들어봤을법한 그의 책이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다. 하스미는 이 책에서 오즈의 영화 세계를 지금껏 어느 평론가도 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읽어낸다. 인물들의 옷, 시선의 방향, 가옥의 구조, 식사 장면 등을 분석하면서 영화를 '안'으로부터 읽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의 독해는 영화 텍스트를 그것이 놓여있는 사회적 기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을 때도 있지만, 하스미의 시선은 오즈의 영화를 너무나 풍요롭게 만드는 나머지 그 텍스트의 의미가 사회를 넘어 독자의 감성 안으로까지 침투해 들어오게 한다.
해석을 과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독자가 텍스트의 해석된 의미에 감화될 정도로 세밀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 그런 식의 해석은 자칫 '덕후'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안으로부터의 잘된 해석에는 폐쇄적인 덕후 문화를 넘어서는 긍정적 에너지가 담길 수 있다. 솔직히 하스미나 다이어가 오즈 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진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읽어냈는지 상세히 기억해내긴 힘들겠지만, 마치 <마담 보바리>의 유명한 농업공진회 장면의 숨막히는 묘사를 읽을 때처럼, 좋은 해석은 그 자체로 '좋다'. 그런 독서는 나를 풍요롭게 한다.
다음 집어든 책은 빔 벤더스의 <한번은>(이봄)이다. 요즘은 좀 뜸하지만 90년대쯤에는 많은 영화팬들의 숭상을 받던 이름이었다. 아마 <파리, 텍사스>나 <베를린 천사의 시> 같은 작품이 인기를 얻었고, 후에는 다큐멘터리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흥행(!)에도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팬들은 <페널티킥을 맞이하는 골키퍼의 불안> 같이 기괴한 제목의 벤더스 영화를 언제나 볼 수 있을까 기다리기도 했고.
<한번은>은 벤더스가 사진 찍는 일에도 관심이 많음을, 그리고 매우 여러 곳을 싸돌아다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이사벨라 로셀리니, 마틴 스콜세지, 구로사와 아키라, 마이클 포웰, 오시마 나기사, 장 뤽 고다르, 니콜라스 레이, 데니스 호퍼 등을 만났다. 그런 이들을 만나 찍은 사진을 설명하면서 "한번은 모뉴먼트 밸리로 가는 길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만났다. 그는 자동차 밑에 누워 타이어를 교체하고 있었다." 같이 설명하는 식이다. 솔직히 못믿겠다. 그 넓은 미국땅에서 사람 하나 없는 광막한 사막을 지나는데, 마침 누군가가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었고, 그가 바로 마틴 스콜세지였다는 말을 너라면 믿겠니.
이사벨라 로셀리니 요즘 뭐하나요. Imdb 찾아보니까 꾸준히 나오긴 나오는데 본 게 하나도 없네.
과장이든 허풍이든 진실이든, <한번은>에 담긴 벤더스의 사진은 꽤 멋지다. 특히 미국의 기괴한 풍경을 찍었을 때 벤더스의 감각이 반짝반짝 한다. 사막 한가운데 거꾸로 처박힌 경비행기, 유치하지만 거대한 공룡 모형, 소도시에서 벌어진 키치한 가장 행렬 등이 그러하다. 이런 장면들은 곧바로 <파리, 텍사스>의 한 씬으로 삽입해도 무난할 것 같은데, 라이 쿠더의 기타 소리가 저절로 들리는 듯 하다. 공간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것인지, 눈이 밝은 것인지, 많이 돌아다니고 많이 찍었기 때문인지, 아무튼 재미있는 사진들이다.
마지막으로 꺼낸 책은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워크룸프레스)이다. 브레히트가 신문의 전쟁 보도 사진을 보면서 거기에 짤막하게 시를 붙이는 형식이다. 책 날개에 써있는 브레히트의 말 "진실은 구체적이다"가 책의 기조를 보여준다. 차갑게 비판하면서 뜨거운 적의에 불타는 이 시들을 읽으면, 추운 겨울 아침 갓 끓인 차 한 잔을 호호 불어 마시면서 신문을 펴든 채 딱딱한 빵을 뜯으며 투덜대는 시인의 모습이 자동연상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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