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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가려는 아이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청소년책인지 모르고 집었는데, 잘 읽히고 감동도 있다. 창의적이고 전략적인 시위 문화에 대해 느끼는 바도 생기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저녁 뉴스 시간에 맞춰 시위를 계획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신시아 Y 레빈슨 지음·박영록 옮김/낮은산/248쪽/1만5000원


한 사회가 오랜 시간 다져온 생각이나 제도 따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바깥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해도 마찬가지다. 이권을 지키기 위한 주류의 저항 때문이든, 낡은 습속을 벗기 싫어하는 보수적 사람들 때문이든, 세상의 혼란을 두려워하는 민초들 때문이든.


그래서 낡은 틀이 바뀌는데는 새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땀, 심지어 피가 필요하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대체로 법적인 성인을 가리킨다. 허나 이렇게 다가올 새 세상에는 어른 뿐 아니라 곧 어른이 될 청소년도 살아갈터이니, ‘법적인 성인’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타당할까. 


우리는 10대의 ‘본능적인 정의감’이 역사의 동력이 된 사례를 알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4·19 혁명에서 청소년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때 청소년들은 서툴고 사려 깊지 못할지언정, 옳은 것을 믿고 그른 것을 물리치려는 열정만은 어느 세대에도 뒤지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원제 We‘ve got a job: The 1963 Birmingham children’s march)는 바로 그런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청소년용으로 쓰여졌지만, 그것은 쉬운 문체로 간결하게 서술됐다는 뜻이지 내용이 빈약하거나 깊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흑인 민권 운동이 폭발했던 196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시가 배경이다. 이곳은 미국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남부다. 이때로부터 100여년전 벌어진 남북 전쟁의 여파로 미국내 노예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러나 미국의 흑인들은 노예는 아니되, 백인과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했다. 남부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실질적인 흑백 분리 제도가 시행중이었다. 유색인종은 백인의 식당에 가지 못했고, 백인과 같은 좌석에서 영화를 볼 수 없었고, 백인의 음수대를 이용하지 못했다. 백인만 교육받는 학교, 백인만 치료하는 병원이 있었다. 흑인에겐 일자리도 드물었다. 민간기업은 물론 정부도 흑인을 채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흑인 여성은 가사도우미, 흑인 남성은 저임금 일용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영장, 골프장에도 흑인을 출입시켜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자, 백인들은 수영장, 골프장을 아예 폐쇄시켰다. 흑인이 선거인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선 시험에 통과해야 했는데, 문제란 것이 가관이었다. 앨라배마주의 67개 군의 이름을 모두 외워 쓰라는 것은 약과였다. “비누 한 개에는 얼마나 많은 거품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받는다면 출제자의 정신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텐데, 그때 실제로 그런 문제가 나왔다. 


같은 앨라배마주의 몽고메리시에 살던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 전용 좌석에서 일어나길 거부한 뒤 대대적인 버스 보이콧 운동이 일어난 것이 1955년이었다. 몽고메리시는 이듬해 버스내 인종 분리 정책을 폐지했다. 그러나 버밍햄시는 몽고메리시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다. 6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버밍햄시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경찰의 3분의 1이 인종주의 집단 KKK 소속이었고, 민권의 민자만 꺼내도 폭탄 테러의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인종 분리 법률을 어긴 흑인을 잡는데는 그토록 민첩하던 경찰은 흑인의 가정집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백주에 흑인을 집단구타한 백인 패거리들을 색출하는데는 무척 무능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는 한 그것은 세상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고 했다. 당시 버밍햄시가 바로 ‘불의’가 있는 곳이었다. 킹 목사, 프레드 셔틀스워스 목사 등 명망 있는 ‘외부세력’이 이곳 버밍햄시로 모여든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저항세력이 응집하는만큼 탄압의 강도도 더해갔다. 하도 폭탄이 많이 터져서 ‘바밍햄’(Bombingham·Bomb은 폭탄이라는 뜻)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검둥이들이 제멋대로 굴고, 통제되지 않으며, 거만해지고, 법을 어기며, 난폭해지고, 무례해져 가고 있다”고 주장한 불 코너란 이가 경찰서, 소방서, 공립학교, 도서관, 보건당국을 감독하는 공공안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태였다. 흑인 혹은 백인 민권운동가에 대한 테러가 저지되기는커녕 조장되는 분위기였다. 


운동 지도부는 기발한 시위 방식을 개발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비폭력 노선을 지킬 것을 천명한 지도부는 백인 식당에서 밥 먹기, 백인 상점에서 물건 사기, 승인받지 않은 거리 행진하기 등을 계획했다. 경찰이 제지하면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체포되도록 권했다. 그렇게 약 1000명이 체포되면 버밍햄시의 교도소가 가득차고 행정은 마비된다. 그렇다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의를 알릴 수 있다는 것이 지도부의 생각이었다. 


물론 용감한 흑인 성인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를 들으며 “아멘!”, “옳소!”라고 외쳤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생각할게 많다. 눈앞의 폭력이 두려웠고, 훗날의 생계가 걱정됐다. 이빨을 드러낸 채 시위대를 노려보는 경찰견 셰퍼드나 사람을 몇 미터나 뒤로 나뒹굴게 하는 물대포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당할 수 있을까. 체포된 뒤 직장에서 해고되기라도 한다면, 누가 우리 가족을 먹여살릴 것인가. 예배에 모이는 사람은 많았지만,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는 사람은 하루에 10명 안팎이었다. 이래서는 교도소를 채울 수 없다. 운동은 흐지부지되기 직전이었다.  




1963년 버밍햄시의 시위 사진. 경찰견, 물대포가 상시대기중. 


그때 청소년들이 나섰다. 아이들은 앞뒤를 재지 않았다. 물론 알 것은 알만한 나이였다. 여행가는 날이면 엄마가 새벽 3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야 했던 이유, 근사한 백화점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없는 이유는 백인들이 자신들에게 물건을 팔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흑백 분리 제도란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았다. 아이들은 “나는 감옥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논란이 있었다. 자식이 스스로 감옥에 가겠다는데 흔쾌히 허락할 부모가 얼마나 될까. 운동 지도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아무리 목표가 숭고하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아이를 동원해도 되는가. 킹 목사가 반대하자 셔틀스워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선의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데이는 1963년 5월 2일이었다. 아이들이 즐겨듣는 아침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는 이날 아침 “얘들아, 공원에서 파티가 있을 거야. 점심은 거기서 나눠 줄 테니까 칫솔만 챙겨와”라고 말했다. 백인 아이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흑인 아이들은 이것이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임을 눈치챘다. 흑인 청소년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16번가 침례교회에 모였다. 1시가 되자 디제이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찬송을 틀었다. 아이들이 교회문을 열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을 막아선 경찰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들을 호송차에 구기듯 넣었으나, 청소년 시위대는 끝이 없었다. 결국 스쿨 버스가 동원됐다. 아이들은 소풍이라도 가듯 웃고 손 흔들며 체포됐다. 이날 하루만 500~800명의 청소년이 수감됐다. 4월 한 달간 체포된 성인 수의 2~3배였다. 이튿날, 그 다음날에도 아이들의 시위는 이어졌다. 구치소가 넘쳐 헛간을 임시 수용소처럼 써야 했다. 


버밍햄시의 여론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 KKK단과 흑인 민권 운동가들 사이의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인종 통합에 찬성하는 온건한 백인들도 아이들이 시위에 나선다거나, 킹 목사 같은 ‘외부세력’이 개입하는 건 못마땅해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인종적 편견이라는 공기를 마시고 자란 백인 아이들은 백인과 흑인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몰랐다. 이들은 어른이 돼 다른 지역에 가보고서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흑인 공동체 안에서도 여러 가지 목소리가 있었다. 안정된 중산층 흑인들은 킹, 셔틀스워스의 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여겼다. 마침 온건한 성향의 시장이 취임하는 시기였기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의견도 있었다. 킹은 그런 사람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는 순간은 언제나 올바른 시기”라고 쏘아붙였다. 


시위가 이어지자 5월 7일부터 흑인과 백인 지도자들은 협상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비폭력을 대원칙으로 세웠지만, 시위가 길어지자 곳곳에서 경찰과 시위대간의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자칫 폭동으로라도 이어진다면 운동의 대의는 훼손된다. 백인들로서도 생애 처음 겪은 혼란을 빨리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인종 분리 시설 완화와 흑인의 고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문이 10일 발표됐다.


물론 세상은 하루 아침에 뒤집히지 않았다. 인종적 편견은 습관 같았다. 나쁘다는 것을 알아도 고치기는 쉽지 않다. 흑인이 손님으로 들어오자 그냥 자리를 피해버리는 백인 종업원이 여전히 목격됐다. 9월 15일에는 16번가 침례교회에 폭탄이 터져 여학생 4명이 죽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범인들 좀처럼 잡히지 않다가 1977년, 2001년, 2002년 붙잡혀 유죄 판결을 받았다. 



폭탄 테러 당한 16번가 침례교회


그래도 작지만 큰 발전이 있었다. 합의문 발표 이후 흑인 아이들은 시험 삼아 극장, 식당, 상점에 들어가봤다. 놀라는 종업원이나 손님도 있었지만, 이들을 쫓아내거나 경찰에 신고하진 않았다. 물대포를 맞고 개에 물리고 경찰에 뒤통수를 맞고 구치소에 갇히면서 얻어낸 권리였다.  


지금 미국의 최고 지도자는 흑인이다. “흑인에게 물건 안판다”고 말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권리는 오래전 많은 이들이 힘겹게 싸워 조금씩 얻어낸 것이었다. 자유, 존엄, 인권 같은 가치들은 누구에게도 유예되어서는 안된다. 청소년들도 누려야할 이러한 가치를 위해 청소년들이 나서는 과정을 이 책은 차분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