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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되고픈 사람들, <어모털리티>

어모털리티

캐서린 메이어 지음·황덕창 옮김/퍼플카우/400쪽/2만원


학교에 다니던 10대에는 이어폰으로 귀가 떨어져나갈 듯한 음악을 들으며 몸에 딱 붙은 청바지를 입었다. 직장에 취직한 20대에는 재테크를 살피기 시작했다. 30대가 되자 결혼과 출산을 했다. 학부형이 된 40대에는 아이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50대가 돼 아이들을 사회에 내보내고 은퇴 후의 삶을 그려보았다. 은퇴한 60대부터는 손주들이 찾아오는 날을 기다렸다. 


이렇게 한 사회에는 특정 연령대에 기대되는 행동 양식이 있다. 여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거나 삶의 태도를 보이는 이들에 대해선 “나이값 못한다”고 혀를 찬다. 예를 들어 60대 남성이 30살 연하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거나 50대 여성이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할지 짐작해보라.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오늘날과 옛날은 평균수명, 경제력, 사회구조가 다르고 그것이 요구하던 행동 양식도 변했다. 평균 출산 연령이 늦어지고, 비혼자 비율이 늘어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오늘의 세상은 100년 전의 세상보다 더 빨리 변한다. 세상 사람들의 생활 양식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어모털족’은 시사주간 타임지의 유럽 총괄 편집장인 저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mortal’(언젠가 죽는)에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 ‘a’를 붙여 ‘영원히 늙지 않는’이란 뜻으로 썼다. 더 구체적으로는 “10대 후반부터 죽을 때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수준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거의 대체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이 소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책과 영화로 붐을 일으킨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은 어모털족에 대한 그럴듯한 상징이다. 뱀파이어들은 수백 년을 살면서도 늙지 않고, 오랜 경험과 지혜를 이용해 큰 부를 축적했으며, 사랑과 삶에 대한 커다란 갈망을 보이고, 결코 은퇴를 모른다. 이런 뱀파이어에 대한 평범한 인간들의 시선이 그러하듯, 어모털족에 대한 비(非)어모털족의 태도에도 부러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을 것이다. 



어모털족의 우상 컬렌가의 뱀파이어들


어모털족은 나이를 잊고 산다. 언제 사랑하고 일하고 아이를 가지고 은퇴하는 것이 적당한지에 대한 개념이 없다. 원한다면 70대에도 새 연인을 찾아 나설 수 있고, 현역에서 왕성히 활동할 수 있으며, 젊은이들이 즐기는 자동차, 옷을 구매할 수 있다. 연예 산업은 어모털족이 특히 번성하는 곳이다. 80대 중반의 플레이보이 창업주 휴 헤프너는 지금도 흥청망청한 파티를 열어 젊은 여성들과 노닐고, 60대의 가수 엘튼 존은 동성 애인과 함께 아이를 입양했다. 록그룹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는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전히 2시간 동안 무대를 휘젓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어모털족의 삶을 동경한다. 발빠른 상인들이 이런 열망을 모르고 지날리 없다. 제약업계, 화장품업계, 의학계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뱀파이어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겠다고 장담한다. “그 나이에는 다들 그렇다”고 답하는 뻣뻣한 의사는 인기가 없다. 물론 뱀파이어가 되기 위해선 많은 돈이 들지만, 죽으면 돈도 필요 없다는 것이 어모털족의 견해다. 


바뀐 사회가 어모털족을 탄생시켰지만, 어모털족의 등장이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우선 가족 개념이 달라지는 중이다. 여성의 가임기간이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가족 개념의 재구성에 박차를 가한다. 런던여성병원의 산부인과 의사는 말한다. “오늘의 50대는 어제의 30대입니다. … 50세가 넘은 여성에 대한 불임치료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주장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서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40세 이상 산모의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다. 아이를 낳지는 않더라도 늦은 나이에 입양을 하는 이들도 많다. 유명 인사들의 공개 입양 추세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어모털족에게 출산이 가지는 의미는 과거와 조금 다르다. 과거의 출산이 사회나 가문에 대한 의무 같은 것이었다면, 어모털족의 출산은 개인의 성취 혹은 만족을 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자식의 관계도 예전과 상이하다. 어모털족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지만, 자식에게 노후를 책임지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젊은 세대가 등장하면 부모 세대가 뒤로 물러났지만, 어모털족 부모는 그럴 마음이 없다. 


비아그라는 어모털족을 위한 불로초가 됐다. ‘사랑의 열정’은 10~20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모털족은 40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새로 다가오는 사랑의 모험을 거부하지 않는다. 수명이 늘어난만큼 섹스 수명도 늘어났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70~80대에도 성기능이 온전하다는데 중지를 모은다. 능력이 있다면 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한 40대의 어모털족은 말한다. “아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전혀 아녜요. 아내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죠.” 이들에게 결혼을 섹스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 사고방식은 케케묵었다고 느껴질 것이다. 황혼이혼이 늘어나는 현상도 같은 흐름에 있다. 클린턴 정부의 미국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와 그의 아내 티퍼 고어는 결혼 40주년 기념일이 지난 지 1주일만에 “길고 신중한 과정을 거쳐서 함께 내린 결정”이라며 이혼을 알렸다. 민주당원이었지만 결혼 생활에 있어서만큼은 보수적인 이상형이었던 고어 부부의 결별은 변화하는 가족 구성과 사랑의 방식을 보여준다. 



할리우드에는 "가임기 지난 여성은 주연이 될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는데, 유일한 예외가 메릴 스트립(1949~). 60대에 들어서도 <맘마미아>의 주연이다. 


어모털족의 등장과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된 사실은 ‘닭과 달걀’ 같은 문제다. 한 사회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랑하고 일하고 죽어야할 시간을 대략적으로 알려주던 종교는 차츰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사람들이 종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종교가 어떤 사람도 풀지 못한 문제인 죽음에 대해 납득할만한 답을 내놨기 때문이기도 할터이다. 종교가 힘을 잃으니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답이 필요해졌다. 어떤 사람은 과학에서 답을 찾았고, 다른 사람은 죽음을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하며 살았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라는 중세인들의 경구는 어모털족을 날파리만큼도 귀찮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어모털족은 차라리 하버드대 심리학자였다가 영적 전문가로 변신한 리처드 알퍼트의 말에 더 공감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 있으라.”


나이와 죽음에서 주의를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일지도 모른다. 음반유통사업에서 시작해 항공산업까지 진출한 버진그룹 회장 리처드 브랜슨은 어모털 비즈니스맨의 모델과 같다. 긴 머리, 턱수염, 특이한 언어습관을 가진 브랜슨은 60세 생일을 앞두고 런던마라톤을 완주했고, 열기구에 올라 태평양을 건너려 시도했다. 이는 정장에 넥타이를 맨 기존 최고경영자의 모습과는 판이했다. 브랜슨은 “어떤 도전을 하기에도 너무 젊지도 너무 늙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캉디드>는 직업이 인간을 세 가지 악, 즉 권태와 범죄, 폭력, 욕구로부터 구한다고 전하는데, 현대의 노인학자와 심리학자는 ‘위축’이라는 네 번째 악을 추가해도 좋아고 말한다. 은퇴가 지연된다면, 그 어떤 신약보다 젊음을 유지하기 좋을 것이다. 


어모털족의 등장은 마케팅에도 일대 혼란을 불러오는 중이다. 작가 제인 밀러는 77세에 내놓은 회고록 <미친 시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치매 또는 어떤 다른 신체의 쇠약에 대해서든 보험을 들도록 권유하는 모든 글과 프로그램을 피했고, 노인용 별채 공간을 알아보지도 않았다.…내가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고 정말로 믿는지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실제 나이를 믿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이로 소비자들을 분류해 물건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 할아버지가 스포츠카를 몰 수도 있고, 할머니도 아이폰을 쓸 수 있다. 


어모털족의 등장은 나이에 대한 현대 사회의 뿌리깊은 차별과 편견에 대한 역작용이다. 우리는 젊음을 숭상한 나머지, 젊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박해한다. 대중매체가 특히 그러하다. 10대 중반에 데뷔한 아이돌 가수는 10대 후반이면 ‘선배님’ 소리를 듣는다. 연기를 하거나 예능 프로 진행을 하면서 연예인으로서의 경력을 연장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어느날 브라운관에서 사라진다. 그 자리는 또다른 10대 연예인으로 채워진다. 텔레비전 속의 휘황찬란한 젊음을 보는 것에 만족못한 소비자들은 이제 직접 그 젊음을 간직하려고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다. 


어모털족이 턱없는 소비주의와 연결되는 것은 문제다. 과학의 이름으로 불멸을 약속하는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도 목불인견이다. 생체시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음에도 있다고 믿는 채 사는 것은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회피일 뿐이다. 마치 고개를 풀숲에 처박으면 사냥꾼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 짐승처럼 말이다.


저자는 돈을 들여 건강 관리를 받지 않고도 장수하는 비법을 알려준다. 은퇴를 은퇴라고 여기지 말고 뜻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 예를 들어 자원봉사를 한다든가 우리가 가진 힘을 제약하는 시스템과 정치를 바꾸기 위해 활동하는 등의 일이다. 


책은 나이에 휘둘리지 않는 어모털족의 출현을 긍정하거나, 최소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오래 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면, 죽기 전까지 최대한 활력을 누리고 사는 것이 좋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러나 모두가 젊은이임을 자처한다면, 한 사회를 지탱하는데 필요한 ‘노인의 지혜’는 어디에서 구해야 할까. 이 책은 그에 대한 답까지는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