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음악 하고 그림 그린다고 하면 '레퍼런스가 되는 인물'이 있어서 구리게 느껴진다"며 웃었다. 외국에 나갈 때는 직업란에 'Artist'라고 쓰기도 하지만, 한국에선 또 '예술가'라고 자칭하면 구리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연남동 사는 백현진입니다, 라고 소개하면 지들이 어쩔건데"라는 심산이라고 했다. 그는 홍상수의 12번째 작품 <북촌방향>에 잠시 나온다고 하는데, 홍상수는 그의 연기를 보고 연신 "아우 얄미워, 아우 얄미워"라고 했다고 한다.
김창길 기자
백현진(39)을 뭐라고 부를까. 그는 <The End>와 <영원한 농담>이라는 두 편의 영화(본인의 표현으로는 동영상)를 연출했고, 어어부 프로젝트의 보컬이며, 11월에 열 개인전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고, 가끔 영화에 출연해 연기도 한다. 그는 ‘작가’ ‘감독’ ‘선생’ 등의 호칭이 “어색하고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 가서 자신을 소개할 때 “연남동 사는 백현진”이라고 한다. 무얼 하는지 더 캐묻는 사람이 있다면 “직업은 없는데 뭘 하긴 한다”고 답한다.
그의 신작 ‘동영상’인 <영원한 농담>은 최근 LIG아트홀에서 열린 ‘장영규 프로젝트; 들리는 빛’ 공연에서 공개됐다. 장영규는 백현진과 함께 어어부 프로젝트를 이끄는 멤버다.
<영원한 농담>은 한때 ‘기형도 급’의 시인이었으나 현재 제주도에 살면서 시를 쓰지 않는 남자1(오광록)과 그의 후배이자 현재 영화배우인 남자2(박해일)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주고받는 내용이다. 개인전을 위한 회화들이 가득찬 서울 서교동 작업실에서 백현진을 만났다.
-<영원한 농담>은 어떻게 구상했나.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한 공연을 위해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1990년대 홍대에서 같이 놀던 사람들 중 행방이 묘연했던 몇 사람을 만났다. 그들을 보고 평소 하지 못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왜 내려갔다고 하던가.
“난 한때 대도시에서 좌충우돌하고 엉망진창으로 작업하더라도 살아남는 게 예술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치열하게 부딪치고 버텨야지 왜 자꾸 사라질까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 있는 형들 보면서 이렇게 자기들끼리 소소하게 있는 것도 괜찮은 역할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극중 오광록씨 몸통에서 나온 대사처럼 ‘방치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 내가 내려가겠다는 건 아니고 그런 삶을 인정하게 됐다는 얘기다.”
-대낮에 해삼 안주에 사이다를 먹는 설정이 나온다.
“술 먹고 밤에 노는 건 아무리 봐도 홍상수 감독이 제일 잘 찍는다. 그것보다 잘할 여지가 없다.”
백현진은 또 다른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사운드가 유실된 채 발굴된 김기영 감독의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의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상영에 맞춰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는 좋아했나.
“좋아하는 남한 감독 중 한 명이다. <이어도>도 재미있었고, <하녀>처럼 ‘녀’자로 끝나는 영화들도 좋았다. <죽엄의 상자>는 전쟁 끝난 직후 찍었는데, 남북한을 소재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방식이 말 그대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반짝이는 아이디어, 끝없는 리서치 같은 거 안 믿고 관심 없다. ‘다른 사람’이 ‘다른 작업’을 하고 ‘다른 인생’을 산다.”
-주류 상업영화는 잘 안 본다고 하던데.
“텔레비전 켜면 예능 프로그램이 왜 웃긴지 모르겠고, 남한의 상업영화든 다른 나라 상업영화든 흥미가 없다.”
-어어부 프로젝트가 처음 결성된 1994년과 지금을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피부가 달라지고 머리숱이 적어지고 속이 나빠지고 어디 가면 아저씨라 불린다. 그리고 3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많던 화가 없어지고, 냉소도 많이 빠졌다. 분노와 냉소로 갈 곳은 염세밖에 없으니까, 특히 작업할 때는 혹시라도 남은 냉소를 모두 걷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작업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업하다보면 내가 사는 태도를 환기할 수 있다.”
백현진의 <죽엄의 상자> 퍼포먼스는 20일 밤 12시 CGV 압구정에서 열린다. 계수정(피아노), 방준석(기타), 권병준(전자악기 엔지니어) 등과 함께 연주하고 백현진은 변사처럼 영화를 설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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