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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짐승의 삶, <러스트 앤 본>

*스포일러 적정량 함유



이 남자는 한 마리 짐승이다. 싸우고 섹스하고 자고 다시 싸우고... 그 외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물론 싸운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싸우는 건 아니다. 이 남자는 넘처나는 남성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할 뿐이다. 한때 복싱 선수였던 그는 프랑스로 건너와 경비원 일로 연명하는 사이에도 운동을 쉬지 않는다. 그리고 뒷골목의 불법 격투기판에 끼어든다. 돈은? 이겨도 몇 푼 되지 않는다. 이 남자는 그저 때리고 맞고 피흘리는게 즐겁다. 


고향 어딘가에 남은 듯한 아내는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남자에겐 어린 아들이 있지만,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남자에겐 싸울 때 쓰는 에너지 말고도 다른 에너지가 남아 있다. 그래서 괜찮아 보이는 여자가 있으면 수작을 건다. 여자가 불쾌해할 정도의 말과 행동은 가릴 줄 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남자는 기회만 된다면 트레이닝 룸 뒤편의 작은 공간에서라도 일을 치르고 만다. 그러다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을 잊어버리기도 하는데, 남자에겐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남자는 싸우고 섹스하는 것밖에는 관심이 없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짐승입니다!


별 일이 없었다면 남자는 그런 짐승으로 늙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짐승같은 힘도 차츰 사라졌겠지. 남자는 자신의 짐승같은 젊은날을 돌아보며, 운이 좋다면 손에 남은 몇 푼의 돈으로 맥주를 사 마시며, 그렇게 늙어갔겠지. 늙고 힘없는 짐승은 아무도 없는 어딘가로 사라져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자신의 젊은 날을 후회하는 짐승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남자는 그렇게 우아한 짐승이다. 


이 남자는 조금 특별한 한 여자를 만나서도 자신의 짐승됨을 버리지 않는다. 여자는 어떤 사건을 겪었고, 어쩌면 그 사건 이전에도 어떤 이유로, 절망에 빠진 상태였다. 여자가 왜 그런 마음에 빠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신이 왜 우울한지, 언제부터인지, 당신은 아는가. 



짐승은 이 여자를 만납니다. 네, 저라도 만납니다.


여자는 이 남자의 짐승스러움이 좋았던 것 같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여자는 오래전 아주 잠깐 스친 남자에게 전화를 하는데, 아마 그 남자의 짐승스러움만이 자신에게 구원의 빛을 열어줄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 남자는 여자의 집에 오자마자 거무튀튀한 커튼을 확 열어 젖힌다. 오직 짐승의 본능과 결단력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여자의 찡그린 눈 위로 오랜만의 햇빛이 쏟아진다. 둘은 바깥으로 나간다. 


여자는 다시 살기 시작한다. 아니, 아직 아니다. 여자는 아직 섹스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건' 이후의 일이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원하면 말하라고. 언제라도 '출장'오라고 문자를 보내라고. 시간이 닿는다면 꼭 오겠다고. 남자는 섹스 세라피스트인가? 자선가인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가? 글쎼, 어느 쪽도 아닌 것 같다. 남자는 그저 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기 여자가 있다면 나의 남자가 다가가지 못할게 뭐야.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살기 시작한 여자, 그에게 삶의 길을 열어준 짐승.


이제 여자는 진짜로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여자의 길과 짐승의 길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짐승이었으나, 여자는 남자의 짐승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인간이잖아!  


남자가 계속 짐승으로 남아있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남자는 밀림이나 사막에 살고 있지 않다. 남자가 숨쉬고 밥먹고 돈벌고 돈쓰는 곳은 바로 도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그물망은 짐승의 순박함을 순박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돈을 주는 사람이 시키는대로 하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알려 하지 않던 남자는, 바로 그런 행동 때문에 큰 곤경에 처한다. 진짜 짐승이었다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겠지만, 이 남자가 짐승이라는 건 그저 은유였다. 남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너무나 부끄러워, 그저 멀리 달아나는 것밖에는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남자는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자신의 짐승스러움을 이용해 큰 일을 해낸다. 그리고 자신의 짐승스러움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영화의 교훈. 남자는 일단 짐승이어야지 뭐가 되도 된다?!  



원하시면 업어드립니다.

러스트 앤 본. 

자크 오디아르 감독.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마리온 코티아르 출연. 2012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