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아니 5년 전쯤이었다면 <데드풀>을 더 재미있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각양각색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나오고 있다. 옛 슈퍼히어로들에겐 용기, 헌신, 정의감이 필수 덕목이었지만, 요즘 히어로들은 복수심, 공명심, 편집증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데드풀’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심하다. 17일 개봉한 <데드풀>은 가장 안티히어로적인 슈퍼히어로 영화라 할만하다. 전직 특수부대원 웨이드 윌슨(라이언 레이놀즈)은 푼돈을 받는 해결사로 살아간다. 단골 술집에서 만난 연인 바네사 칼리슨(모레나 바카린)과는 침대 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미래를 약속한 사이다. 어느날 윌슨은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받는다. 그런 윌슨에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은밀히 접근해 암 치료를 위한 비밀 실험을 제안한다. 윌슨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실험에 참가해 온갖 고통을 겪는다. 결국 윌슨은 강력한 자기 치유력을 가진 히어로로 거듭나지만, 부작용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갖는다. 데드풀이라는 이름의 히어로로 다시 태어난 그는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악당을 찾아나선다.
데드풀(가운데)과 시네이드 오코너를 닮은 네가소닉 틴에이지 워헤드.
<데드풀>은 오프닝 크레디트부터 작정하고 ‘B급 유머’를 선보인다. 배우, 스태프는 진짜 이름 대신 ‘감독: 돈만 많이 처받는 초짜’(실제 이 영화는 신인 팀 밀러가 연출), ‘제작: 호구들’ ‘쓰잘데기 없는 카메오’ 등으로 표기된다.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출발하는 첫 장면도 우스꽝스럽다. 데드풀은 다른 슈퍼히어로처럼 날거나, 첨단 기술로 무장한 탈 것에 오르는 대신, 노란 택시에 탑승해 인도인 기사의 인생 상담을 들으며 사건 현장으로 떠난다.
데드풀은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엑스맨 등을 배출한 미국의 마블 코믹스 소속이다. 원작 만화 속 데드풀은 자신이 만화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슈퍼히어로였다. 영화 <데드풀>도 비슷하다. 수다스러운 데드풀은 끝없이 다른 슈퍼히어로 주인공들을 언급하며, 20년 이상 활황세인 할리우드산 슈퍼히어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예를 들어 <데드풀>에는 <엑스맨> 시리즈를 통해 익숙해진 ‘자비에 영재학교’가 나온다. 이 학교에 들른 데드풀은 엑스맨 소속의 히어로 콜로서스와 네가소닉 틴에이지 워헤드를 만난 뒤 말한다. “집이 이렇게 큰데 달랑 둘이야? 나머지 엑스맨은 출연료가 모자라 못나오나?”
데드풀이 되기 전의 웨이드 윌슨(오른쪽)과 그의 속궁합 잘맞는 연인.
한국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 미국에서는 R등급을 받은 영화답게 피가 튀고 인체가 절단되고 성적 유머가 난무한다. 지난해 <킹스맨>은 이같은 코드를 썼음에도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때는 킹스맨 집단이 가진 대의, 영국 귀족식 매너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데드풀>은 별다른 포장 없이 폭력과 성의 코드를 노출한다. 점잖은 연인이 ‘데이트 무비’로 선택한다면, 얼굴을 붉힌 채 극장문을 나설지도 모르겠다.
한국보다 1주 먼저 개봉한 미국, 영국, 싱가포르 등지에선 가볍게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2편 제작도 이미 확정됐다. 엔딩 크레디트가 끝난 뒤 나오는 쿠키 영상도 챙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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