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영화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귀여운 딸을 가진 유부녀, 착한 남자 친구를 가진 젊은 여자가 사랑을 하고, 둘 사이엔 확연한 계급차가 존재한다.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팽배하니, 여성의 동성애는 입에 올릴 수 조차 없는 보수적인 시대다. 극적인 사건과 감정을 만들 수 있는 갖가지 장치가 있지만, 제작진은 그런 장치를 이용하지 않고 둘이 감정을 교감하는 과정을 그려내는데 집중한다. 멜로는 사건이 아니라 감정의 장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디테일이다. 아무리 극적인 이벤트가 이어진다 해도, 디테일을 살리지 못한 사랑은 나사를 조이지 않은 구조물처럼 허약할 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은 앞으로 멜로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잡거나, 적어도 한동안 팬들 사이에서 회자될 영화다. 사랑을 나누는 대상이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여자와 여자라는 점이 독특하지만, 관객의 성적지향은 영화를 보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캐롤>은 크게 봐선 ‘퀴어 영화’(성소수자를 다룬 영화)로 분류되겠지만, 헤인즈의 필모그래피로 따지면 <벨벳 골드마인>(1999)보다는 <파 프롬 헤븐>(2003)에 가까운 고전적 스타일의 영화다.
1950년대 뉴욕. 맨해튼의 한 백화점 장난감 매장에서 일하는 테레즈(루니 마라)는 딸을 위한 선물을 사러온 손님 캐롤(케이트 블란쳇)을 만난다. 캐롤이 장갑을 두고간 것을 계기로 다시 만난 둘은 서로에게 묘하게 끌린다. 캐롤이 테레즈에게 자동차 여행을 제안하자, 테레즈는 주저 없이 따라나선다.
캐롤(사진 위)과 테레즈.
이혼 소송 중일지언정 캐롤에겐 부유하고 가정적인 남편, 사랑스러운 딸이 있다. 남편은 줄곧 캐롤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시대 분위기상 딸이 받을지도 모르는 이혼의 상처도 캐롤에겐 부담이다. 테레즈에게도 남자 친구가 있다. 남자 친구는 함께 떠나기로 한 파리 여행 계획을 들려주며 캐롤을 즐겁게 하려 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디테일에 약했다. 캐롤과 테레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만을 늘어놓았다. 남편에게 캐롤은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세상에 전시하기 위해 필요한 ‘트로피 와이프’였다. 자동차, 모피 코트, 보석이나 “사랑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캐롤의 마음을 잡을 수 없음을 남편은 알지 못했다.
테레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테레즈는 남자 친구의 파리 여행 계획에 시큰둥하다. 남자 친구는 백화점 점원의 무미건조한 일상이 파리 여행 한 번으로 해소될 수 없음을 알지 못했고, 테레즈가 사진을 찍고 싶어한다는 사실에도 무심했다. 테레즈가 무심코 흘린 사진가의 꿈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스치듯 만났던 캐롤이었다. 캐롤과 테레즈는 서로 상대의 갈망을 알아챈다. 감정의 결을 읽고 그에 반응한다. 상대를 배려하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둘 사이에 자연스러운 교집합의 영역이 생기게 하는 것, 캐롤과 테레즈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예의 기품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 연기력을 아낌없이 과시한다. 여왕(엘리자베스)이나 요정(반지의 제왕), 나치 장교(인디아나 존스: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처럼 특이한 배역이 아닌, 이혼 직전의 유부녀도 빼어나게 소화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강인한 눈빛이나 인상 때문에 한 배우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이 남용되거나 오용되곤 한다는 사실을 블란쳇의 멜로드라마 연기에서 알 수 있다. 블란쳇은 <캐롤> 연기로 이달 말 열리는 제88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상대역 루니 마라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캐롤>은 우아하다. 철저히 교육 받은 옛 귀족의 자태 같다. 인물의 감정을 과장해 그리지 않고,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는다. 누군가 기억상실증에 걸리거나, 죽거나, 복수하거나, 터무니없는 비극을 겪지 않아도 멜로드라마의 본령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한국영화계에선 멜로영화를 찾기 힘들다. <캐롤>은 삭막해진 멜로 감성에 잔잔하지만 강력한 불씨를 댕길 영화다. 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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