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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지도, 굴욕적이지도 않은 삶 '스토너'




'설레발은 필패'라는 옛 명언이 있지만,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의 첫 20페이지를 채 읽지 않았을 때, 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리라는 걸 알았다. '스토너'는 1965년 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나, 50년쯤 지난 뒤 재발견됐다. 물론 작가는 1994년 향년 72세로 죽은 뒤였다. 존 윌리엄스의 삶은 소설 속 윌리엄 스토너처럼, 영광스럽지도 그렇다고 굴욕스럽지도 않은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한 문단 정도로 요약한 뒤 시작한다. 189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19세에 미주리 대학에 들어간 뒤 영문학을 전공해 그곳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고 1956년 사망하기 전까지 모교 강단에 섰다. 스토너는 평생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고, 학생이나 동료 교수에게 뚜렷하게 기억되지도 않았다. 마치 그가 정성을 다해 썼으나 많이 팔리지 않았고 학계에서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책처럼, 스토너의 삶은 지구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처럼 망각될 것이다. 


그렇게 평범하고 인상적이지 않은 스토너의 삶을, 작가는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데다가 간결한 문장으로 담아낸다. 오며가며 10분씩 끊어서 독서를 하기도 했지만, 직전에 읽은 내용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평생 농부로 살줄 알았던 스토너는 아버지의 결심으로 인해 대학에 진학해 농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간 스토너를 사로잡은 것은 농사 짓기에 대한 심화된 기술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였다. 듣도보도 못한 소네트에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낀 스토너는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아들을 손에서 떠나보낸 아버지는 스토너의 선택을 무기력하거나 담담하거나 조금 당황스럽게 지켜볼 뿐이다. 


무기력, 담담함, 약간의 당황. 이것은 '스토너'를 지배하는 정조 중 하나다. 스토너의 삶은 마치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한귀퉁이의 부품처럼 흘러가버린다. 물론 스토너는 살면서 몇 차례 선택하고 결단했다.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고, 아내 이디스에게 과감히 구혼했다. 친구들과 함께 참전하는 대신 학교에 남았고, 자신의 학생과 연애했다. 같은 과 교수 중 한 명과 숙적이 돼서 수십년간 반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토너 인생의 흐름을 높은 상공에서 살펴보면, 그리 굽이치지 않는 평탄한 시냇물 같을 것이다. 스토너는 그러한 삶을, 마치 지구 반대편 어느 평범한 서민의 삶에 대해 전해듣듯이 담담하게 살아냈다. 어쩌면, 참전해서 훈장을 받을 정도로 용맹하게 싸웠거나, 학계에 오래 남을 중요한 책을 썼거나, 세상이 떠들석한 연애를 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높은 상공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도 스토너와 그리 다르지 않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누구나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 (거의) 대부분 사람의 삶은 스토너처럼, 위대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다. 스토너는 연애 상대인 캐서린의 논문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럽게 이런 말로 위로한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 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그건 스토너 자신의 삶에 대한 요약이기도 했다. 


스토너는 정년연장 옵션을 사용해 학교에 더 남아있으려 하지만, 암에 걸려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스토너는 절망하지도, 피하려 애쓰지도 않는다. 스토너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 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병상의 스토너는 자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나. 어떤 기대라도 우리 삶 속에서 충족되는 일은 거의 없고, 그래서 기대는 허망한 것이며, 그렇다고 우리 삶을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음을, '스토너'는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