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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읽고+출판 담당 기간 만료

찾아보니 2월쯤부터 출판 담당 2진을 한 것 같다. 회사에 조직 개편이 있으면서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출판 담당이 끝났다. 11개월 정도 출판 담당을 한 셈이다. 1진 선배에게 오는 책의 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화요일이면 책상 가득 쌓이는 책 봉투를 뜯어 갓 배달된 책들을 훑어보곤 했다. 대단한 애서가나 장서가, 독서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처지로서는 즐거웠던 11개월이었다. 영화가 그렇듯, 오래도록 생각이 나는 좋은 책은 드문 것 같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골라 읽은 책이 만족감을 줬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앞으로는 다시 독자로 돌아간다. 화요일부터 목요일 오전까지, 허겁지겁 활자들을 주워 삼키는 일도 없겠다. 이 블로그의 '서재' 카테고리 업데이트도 뜸해지겠다. 

아울러 출판 담당으로서의 마지막 기사를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같은 책에 대해 쓸 수 있어서 기쁘다. 비교해볼만한 책으로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이 있겠다.  그에 대한 리뷰 기사도 옮겨 놓는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 휴머니스트

신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신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의 정신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리처드 도킨스가 아무리 소리 높여 무신론을 주장한다 해도, 이 역시 서양에서 신에 대한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확인시킬 뿐이다. 서양 문화의 두 뿌리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신의 개념을 논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시리즈 1~4> 등 대중적인 철학서를 펴낸 철학자 김용규가 3년간의 집필 끝에 864쪽에 이르는 묵직한 책을 내놨다. 서양 문명에서 기독교의 의미, 그 핵심인 신의 본질을 설명하는 책이다. 두께로 보나 주제로 보나 읽기가 수월치 않을 듯한 인상을 주는데, 오해다. 김용규는 딸에게 남겨줄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의 서술 방식을 고대 헬레니즘 시대 성직자들이 설교할 때 즐겨 쓰던 ‘디아트리베’ 수사법이라고 일컫는다. ‘기분풀이’ 내지 ‘환담’이라는 뜻의 디아트리베는 전문용어 대신 비속하지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머리말, 본문, 맺음말이 모두 경어체다. 고대 신학에서 현대 과학까지 종횡무진하지만 이해가 어렵지 않다. 새로운 이론은 없지만 정리가 잘돼 있다. 한국어로 쓰여진 기독교 신 이야기가 이보다 쉽게 읽히기도 어렵겠다.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다 등 5개 장으로 나뉘었다. 미켈란젤로가 성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책은 시작한다. 이 그림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신은 흰 머리, 흰 수염의 노인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신은 정말 그렇게 생겼을까. 그럴 리가 없다.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남성, 여성, 늙은이, 젊은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예술적으로는 위대할지언정 신학적으로는 오류다. 미켈란젤로는 당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헬레니즘의 초인적 영웅에 가까운 신인 제우스의 모습을 빌려와 헤브라이즘의 신을 그려냈다.
오히려 서양 문명 속 신의 이미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표현대로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 자체를 갖고 있다.” 신은 인간이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다. 신이 바다라면 인간은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야고보서 4:14)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르네 데카르트 등 서양 사상사의 거목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어느 지점에선가 빈틈을 보였다. 저자는 이마누엘 칸트의 이론을 최종 답변으로 삼는 듯하다. 칸트는 신은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되지 않기에 그에 대한 모든 인식은 공허하다고 봤다. 즉 신의 존재 증명을 위한 모든 논증이 부질없다는 뜻이다. 이후의 신앙인들은 신에 관한 명제와 논증을 ‘진리의 땅’에서 ‘폭풍이 이는 험한 바다’로 내쫓은 칸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칸트를 따른다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자연과학자의 공격으로부터도 신을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무신론자들의 아버지와 같은 찰스 다윈조차 신이 없다고 주장하진 않았다. 그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로 자처했다.

진리에 눈감은 성직자보다 원숭이를 조상으로 삼겠다던 토머스 헉슬리도 만년에는 인간은 진화와 윤리를 구분해야 하고 생존경쟁, 적자생존 같은 진화의 법칙을 내세워 도덕률에 어긋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오히려 2000년간 숱한 공격을 견디며 발전해온 신학에는 진화의 맹목적성과 창조의 합목적성을 조화시킬 품이 넉넉하다.

다윈주의,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 등 ‘작은 이야기’가 넘쳐나면서 현대의 인간은 신, 영웅, 자기희생, 봉사 같은 ‘큰 이야기’를 잊었다. 그러나 칸트의 경구를 뒤틀어 설명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다. 잊혀진 ‘큰 이야기’를 떠올려야 하는 이유다. 3만7000원




신을 위한 변론
카렌 암스트롱 | 웅진지식하우스

논리학에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상대의 주장을 왜곡시킨 뒤, 그 왜곡된 주장을 논파해 논증에서 이긴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요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무신론자들이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근거한 유물론으로 신과 종교의 권위를 파괴했다.

그러나 <신을 위한 변론(원제 The Case for God)>을 쓴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도킨스와 히친스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했다. 엉뚱한 상대를 공격한 뒤 승리를 선언한 셈이다. 도킨스·히친스가 파괴했다고 믿는 종교는 인류가 오랜 시간 간직해온 종교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암스트롱의 비판적 시선은 현대의 종교 근본주의자들에게도 향한다. 사찰에 가서 예배를 하는 기독교도들이든,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탈레반이든 신을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타종교를 공격하고, 경전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신은 현대에 ‘발명’된 신이다.

책은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 벽화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1만7000여년 전 구석기시대의 조상들이 꾸며놓은 이 벽화를 보기 위해 방문객들은 창자처럼 꾸불꾸불한 굴속을 더듬어 내려가야 한다. 안내원이 손전등을 켜는 순간, 천장에는 울부짖는 수사슴, 뛰어오르는 암소,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말들이 나타난다. 이 동굴은 친구이자 수호자였던 동물을 죽이는 데 죄책감을 느꼈던 우리 조상들이 성스러운 제의를 행하는 장소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가설이다. “애초부터 종교적 삶이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에 뿌리를 두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다.

종교는 실천이고 의례였다. 경전의 문자적 의미를 해석해 그대로 따르는 건 수만년 동안 종교에 의지해온 인류에게 낯선 일이었다. 질병, 노화, 고통, 죽음 등 어찌할 수 없는 사태에 대응할 힘을 주고 위로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었다.

물론 인간은 이성을 발전시켰다. 이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은 양립 가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가르쳤다. 프랑스 랑의 안셀무스는 “이해를 통해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해에 이른다”고 말했다.

경전에 대한 이해도 오늘날과 달랐다. 중세 유럽의 수사들에게 렉티오(독서)는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내면세계로 들어가 성서에 계시된 진리를 직면하게 만드는 영성수련 과정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에 대한 ‘창세기’의 가르침도 문자적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탈무드 시대의 랍비들은 아담의 추방을 재앙으로 보지 않았고, 악한 성향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여겼다. 오늘날보다 훨씬 유연한 해석이다.

1483년 스페인에는 종교재판소가 설립됐다. 이는 인류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종교재판은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변신하고 있던 스페인 집권자들의 발명품이었다. 각자의 독립된 종교적 심성을 간직하고 있던 독립 왕국들을 통합하기 위한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성의 한계는 명확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현현하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런 앎과 느낌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1944년 영국에서 태어난 저자는 17세에 수녀가 됐지만 엄격한 규율에 실망해 7년 뒤 환속했다. 이후 세계 종교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는 종교학자가 됐다. 정준형 옮김.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