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2000)를 읽다. 옮긴이 송병선의 해설에 따르면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는 '독재자 소설'의 전통이 있다고 한다. 독재자 소설은 1844년 작품인 <아말리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대체 그 동네엔 독재자가 얼마나 많았기에 독재자 소설이란 장르까지 탄생했을까 황당하다. 그러므로 나도 <염소의 축제>를 읽고 한국에 독재자 소설이 왜 많지 않은지 궁금해졌다. 한국의 현대사는 줄곧 독재자의 집권기였는데도 말이다. 독재자가 집권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많았지만, 독재자 개인을 다룬 소설은 본 적이 없다. 박정희에 대한 이런저런 책이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 논픽션이었다. 독재자는 소설 따위로 다루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였을까. 그러나 그 어떤 논픽션이 <염소의 축제> 같은 픽션보다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염소의 축제>가 다루는 독재자는 1931년~1961년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치했던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다. 소설은 세 가지 시점에서 전개된다. 35년만에 고국 도미니카로 돌아온 트루히요 집권기 고위 관료의 딸 우라니아, 트루히요와 그 주변인, 트루히요를 암살하려는 사람들. 우라니아는 현재고, 나머지는 과거 시점이다. 우라니아가 35년동안 아버지나 고국과 연락을 끊은 건 단지 독재로 인한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라니아와 그의 아버지와 트루히요 사이에 있었던 일이 소설의 결말부에 제시된다. 그러나 난 이 대목엔 그리 움직이지 않았다.
더 흥미진진한건 트루히요의 내면이었다. 소설 제목의 '염소'란 트루히요를 지칭한다. 서양에서 염소는 악마의 상징이자 성욕이 왕성한 남자를 가리키는데, 트루히요는 둘 다다. 70을 바라보는 노인인데, 정력이 왕성하다. 그에게 섹스할 수 있는 힘은 곧 삶의 에너지다. 그러므로 몸에 이상 기운이 나타나 더 이상 왕성한 정력을 발휘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미칠듯이 불안해한다.
그러나 트루히요는 여자만 밝히는 색정광이 아니다. 책의 묘사에 따르면 트루히요 집권기 동안 도미니카는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사회기반시설은 확충됐고, 굶어죽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인민들은 가난했지만, 이는 트루히요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트루히요의 독재를 문제삼은 서방의 경제제제에 기인한 바 컸다. 트루히요 사망 이후, 도미니카는 더 한 혼란에 빠진다.
소설에는 재미있는 인물이 좀 더 나온다. 하나는 쿠데타의 수장으로, 트루히요가 죽은 뒤 그의 권력을 물려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어영부영하다가 모든 걸 날려버린 로만 장군이다. 평소의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으나, 결단이 필요한 순간 결단을 조금씩 뒤로 미룸으로써 트루히요의 가신들에게 붙잡히고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그의 고문 장면은 책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다. 제목의 '축제'란 이 묘사하기조차 힘든 고문의 축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발라게르 대통령은 트루히요의 허수아비였다. 수십년간 트루히요주의자로 살았고, 트루히요조차 '서기' 정도로 여긴 왜소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급변 상황에 냉철한 정세 판단과 기민한 언변으로 결국 이후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난 <그때 그 사람들>을 재밌게 봤다. 영화 개봉 당시엔 박정희를 놀려먹였다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그 영화가 상영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라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난 이제 임상수보다 조금 더 전진한 관점을 보고 싶다. 이죽거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독재자는 부패하고 무능한 사회의 원인인가 결과인가. 난 후자쪽인 것 같다. 그 XX먹을 놈의 인간의 마음 속을 샅샅히 해짚어 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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