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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이슈

민주주의를 위한 마음의 습관




아이가 'DOC와 춤을' 노래하는 것 듣고 쓴 칼럼. 그나저나 김대중 후보의 'DJ와 춤을' 뮤직비디오 찾아보다가 김종필, 박태준도 나와서 깜놀. 김대중이 집권하기 위해선 그 정도로 상상치 못할 '대연정'이 필요했던 것. 


언젠가부터 초등학생인 아이가 ‘DOC와 춤을’이란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이가 태어나기 십수년 전의 노래다. 어쩐 일인가 살펴보니 학교에서 이 노래에 맞춰 체조를 한 모양이다. 1990년대 그룹인 DJ DOC의 경쾌하고 흥겨운 멜로디가 요즘 초등학생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런데 무심코 노래를 듣다 가사를 깨닫고 멍해졌다. 몇 구절 인용해보자.

“옆집 아저씨와 밥을 먹었지. 그 아저씨 내 젓가락질 보고 뭐라 그래. 하지만 난 이게 좋아 편해 밥만 잘 먹지. 나는 나예요 상관 말아 요요요.”


DOC와 춤을’이 나온 건 1997년 4월, 외환위기 이전이었다. 그때 한국은 번영의 약속을 믿는 나라였다. 경제만이 아니다. 군사정권의 권위주의는 물러나고,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었다. 많은 예술가와 활동가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표현의 자유가 조금 더 확보됐다.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이 데뷔했고, 서태지가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순식간에 바꿨다. 이 시대에 20대를 보낸 1970년대생, 이른바 ‘엑스세대’는 풍요로운 물질과 문화의 수혜자였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남았다. 지난해 12월 통계청이 내놓은 ‘한국의 사회동향’을 보면, 1970년대생은 앞선 세대는 물론 1980년대 이후 세대보다도 진보적이었다.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강했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기성세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젓가락질 이상하다고 나무라는 옆집 아저씨에게 반박하는 세대다.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텐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라고 상상하는 세대다.

“옆집 아저씨 반짝 대머리 옆 머리로 속알머리 감추려고 애써요. 억지로 빗어넘긴 머리 약한 모습이에요. 감추지 마요 빡빡 밀어 요요요.”

모든 권위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의 획일적 기준 같은 것, 서울 지하철 압구정역 성형광고판의 똑같은 얼굴 같은 것.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취재한 1994년도 방송 뉴스가 지난해 소셜미디어에서 별안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신촌, 강남 등지를 오가는 젊은이들은 미니스커트에 군화를 신거나, 모자를 거꾸로 쓰거나, 자동차 열쇠를 목에 걸고 다녔다. 어딘지 이상해 보이지만, 정작 이런 차림을 한 사람들은 즐거운 것 같다. “남의 시선을 느끼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은 이는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입고 싶은 대로 입어요.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라고 답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이 인터뷰이의 말을 따서 ‘#이렇게입으면기분이조크든요’라는 표현이 유행하기도 했다. 

‘헬조선’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암울한 사회 속 주눅든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1990년대 사람들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충격에 가까웠다. 어쩔 수 없는 대머리를 감추려고 애쓸 바에는 아예 삭발을 하는 것이 어떤가. “뒤통수가 안 예뻐도 빡빡 밀어요”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타인의 시선, 사회의 기준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DJ DOC의 노래에 녹아 있었다.

물론 DJ DOC가 노래한 세상은 1990년대에도 실현되지 않은 꿈이었지만 곧 다가올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어떤가. 올해 경향신문 ‘민주주의는 목소리다’ 기획팀은 다양한 세대·지역의 시민 1000명을 만났다. 이들에게 평소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지 물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질문할 때 눈치를 본다”, “윗사람이 나의 평소 생각과 다른 말을 할 경우 일단 내가 틀렸는지부터 살펴본다”는 답변이 60%를 상회했다. 지금 한국은 교수가 강의시간에 질문한 학생에게 “독해능력이 떨어진다”고, 디자인 회의에서 자기 의견을 말한 신입사원에게 “어려서 뭘 모른다”고 면박주는 사회다. 회식을 앞두고 ‘삼겹살 아니라 돈가스 먹고 싶다’고 속으로만 삼켜야 하는 사회다.

한 달 뒤면 새 대통령이 뽑힌다. 새 대통령은 새 세상을 열 수 있을까. 캐서린 문 미국 웰즐리대 교수는 “한국인들은 공권력 남용에 저항하는 공적 시위에는 능하지만 여전히 직장, 학교, 가정 등에서의 극단적인 위계를 통한 가혹 행위나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누구인가는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진 않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사회의 다양성이 주는 긴장을 즐기고,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는 민주주의에서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마음의 습관’이 없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그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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