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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이슈

전인권과 지미 헨드릭스




국가 연주도 감동적일 수 있을까. 어떤 음악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달려 있다. 

전인권의 공연은 11·19 촛불집회의 하이라이트였다. 그가 부른 노래의 가사들을 살펴보면 이날의 선곡이 매우 정교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첫 곡 ‘상록수’는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가사로 끝난다. 이어서 부른 ‘걱정말아요 그대’에는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라는 가사가 있다. 이날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에 모인 100만 시민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사였다. 

세번째 곡이 ‘애국가’였다. 그간 애국가는 보수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부정하려 해도 애국가에는 보수가 강조하는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전인권은 이날 대담하게 애국가를 불렀다. 분노한 야수와 같은 특유의 창법으로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애국가를 노래했다. 

전인권의 애국가는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는 시민의 분노를 대변했다. 툭하면 “그렇게 대한민국이 싫으면 북한으로 가라”고 윽박지르는 극우에 대한 반격이었다. 이 나라는 1% 정치·경제 권력자의 것이 아닌, 99% 시민의 나라임을 주장하는 노래였다. 이날 광화문에 나온 사람들이 ‘애국’이고, 청와대 안에 숨은 사람들은 ‘매국’임을 말하고 있었다.
 


비슷한 일이 47년전 미국에서도 있었다. 전설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이었던 1969년 8월 18일. 젊은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무대에 올랐다. 그가 연주한 곡은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였다. 술과 마약과 꽃을 가진 히피들 사이에서 듣기엔 낯선 곡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헨드릭스의 연주는 상궤를 벗어났다. 비교적 평범하게 시작한 연주는 헨드릭스 특유의 뒤틀리고 늘어지는 주법으로 이어졌다. 곡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왜곡이 너무나 심해 원곡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원곡에 흡사하게 돌아왔다가 다시 왜곡된 소리를 들겨주길 반복했다. 보통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연주하는데에는 2분 남짓 걸린다. 그러나 이날 연주는 그 2배인 4분 정도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었다. 그에 맞선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도 절정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국가 연주로 꼽히는 이날 헨드릭스의 퍼포먼스에서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의 비명과 빛바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읽었다.


이들의 국가 연주는 나라에 대한 맹목적 충성 맹세가 아니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나라에 대한 경고이자, 나라를 이루는 대다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표시였다. 1969년 지미 헨드릭스, 그리고 2016년 전인권은 국가 연주의 새로운 방법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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