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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적인 갈구와 구원, 엔도 슈사쿠의 <침묵>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다. 홍성사에서 나온 소설인데, 이곳은 기독교계 출판사로 최근에는 이재철 목사,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대담집을 냈다. 역자 후기에는 "번역을 끝내면서 가슴 뿌듯하게 밀려오는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했다"고 적혀있다. 물론 <침묵>도 '진정한 믿음'을 찾아가는 카톨릭 사제들의 이야기지만, 이 책을 다른 대형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넣어도 항의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엔도 슈사쿠(1923~1996)


일본은 기독교가 그다지 세를 떨치지 못한 나라로 알려져있지만 <침묵>의 배경이 된 17세기를 보면 역사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일찌감치 네덜란드, 포루투갈 등 당대 해상 무역을 장악했던 서유럽 국가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군인, 상인과 함께 선교사가 군함을 타고 상륙하는 모습은 제국주의 무역의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훗날 제국주의의 확장사를 상식 수준에서 전해들은 독자의 이미지일 뿐, 미지의 이교도 나라에 첫 발을 내딛는 선교사들은 자신이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고국으로 돌아가기는커녕,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선교 여행에 선뜻 나선 사제들의 모습은 숭고하거나 광기 어리거나 둘 중 하나다.  


한때 기독교 포교를 허용해 많은 교회와 신도가 생겼던 일본은, 그러나 기존 봉건제의 가치가 새 종교의 가치에 의해 혼란을 겪을 조짐이 일어나자 기독교를 전면 금지한다. 사제들은 추방당하거나 죽임 당하고, 신도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일본의 막부 세력은 배교하는 이를 살려줬는데, 신도들은 배교의 증거로 예수의 상이 그려진 성화를 밟아야 했다. (얼마전 "김정일 개새끼"라고 공개적으로 말해야 '종북' 딱지를 뗄 수 있다고 한 한 보수 논객의 말을 두고 <침묵>의 '성화 밟기'에 비유한 사람이 많았다)


<침묵>은 배교했다는 소문이 도는 스승 사제를 찾아 일본에 밀입국한 젊은 신부 로드리고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로드리고는 큰 고난의 시기 '주님'은 어디서 '침묵'하고 계시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물론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신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성화를 밟아야할 순간, 마침내 로드리고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진짜 신의 음성인지, 로드리고의 환청인지 바람인지는 글을 쓴 엔도 슈사쿠조차 모를 것이다. 


믿음을 지킬만큼 강하지도, 완전히 신부를 저버릴만큼 사악하지도 않은 기치지로라는 사내의 존재는, 영화로 치면 <7인의 사무라이>의 미후네 도시로, <타짜>의 유해진 같은 존재다. (미후네 도시로와 유해진의 느낌이 무척 다르다는 것은 잘 안다)


<침묵>의 존재를 알고서부터 이 소설을 꼭 읽고 싶었다. 안도 다다오의 숭고한 교회 건물 사진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일본 기독교의 이미지도 궁금했다. 물론 만족스러운 독서경험이었다. 그러나 여러모로 '교과서'같은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독자의 긴장감을 자극하는 구성이 절묘하며, 등장 인물이 가장 적당할 때 들어왔다가 나간다. 고문의 표현 수위도 견딜 만큼만 보여준다. 작가의 영감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것이 아닌, 독자의 이해라는 목적을 위해 쓰여진 소설에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철저한 계획없이 쓰여지는 장편이란 있기 힘들고 있다 해도 읽기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서도. 그렇다면 이 책을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넣으면 안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