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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쓰는 지옥인가,'아수라'


개봉 첫 주 200만에 못미칠 듯. 손익분기점은 350만 가량. 


조각 같은 외모의 정우성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극장문을 나설 수도 있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아수라>(연출 김성수) 상영시간 내내 정우성의 얼굴은 갖가지 방식으로 상해 있다. 눈빛은 때로 미친 것처럼 희번덕거린다. 그가 내뱉은 대사의 절반엔 욕설이 섞여 있다. 

정우성뿐 아니다.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정만식 등 주요 배역은 물론, 김원해, 김종수, 김해곤, 윤제문 등 조연까지도, 이 영화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없다. 법도 없고 의리도 없고 윤리도 없다. 선한 사람은 없다. 악당과 더 나쁜 악당이 있을 뿐이다. 아니, 애초에 이 영화 속 사람들에게 선악 개념을 적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수라>의 등장인물들은 문화와 양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악다구니 쓰는 동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축생계와 인간계 사이의 중생을 일컫는 ‘아수라(阿修羅)’를 제목으로 삼았을 때부터 짐작한 분위기였다.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부패한 시장 박성배(황정민)의 수하 노릇을 하며 온갖 지저분한 뒷일을 처리한다. 한도경에겐 말기암으로 투병하는 아내가 있고, 박성배는 한도경에게 두둑한 뒷돈을 준다. 검사 김차인(곽도원)과 수사관 도창학(정만식)은 한도경의 약점을 잡은 뒤, 박성배를 체포할 증거를 가져오라고 독촉한다. 한도경은 양측을 오가며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한다. 

<아수라>에서 가장 악질적인 인간은 인구 48만명의 가상도시인 안남시 시장 박성배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을 가로채 가까스로 당선무효형을 면한 그는 정치인이나 행정가라기보다는 조직폭력배에 가깝다. 박성배는 재개발을 통한 이익을 독차지하려 들고, 이를 가로막는 누구든 제거한다. 현대의 정치인에게 허용된 토론, 공청회, 여론조성 등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폭력이나 어처구니없는 여론조작을 통해서다. 박성배는 은근히 폭력을 사주하는 선을 넘어 대규모 마약거래까지 알선한다. 

<아수라> 속 안남시는 한국이 아니라 마약왕이 장악한 멕시코나 콜롬비아의 어느 도시 같다. 그를 잡아넣으려는 검사 김차인도 다를 바 없다. 김차인은 ‘정의’를 말하지만, 이를 위한 수단은 극히 폭력적이다. 협박과 공갈을 일삼고, 피의자를 폭행하기도 한다. 






이렇듯 <아수라>를 지배하는 정서는 ‘과잉’이다. 이 영화는 <범죄와의 전쟁>(2012), <신세계>(2013), <내부자들>(2015) 같은 한국형 누아르 영화의 계보를 잇지만, 그 어느 영화보다 폭력의 수위가 높다. 단지 피가 많이 흐르거나, 죽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 내내 유머나 로맨스는 끼어들 틈이 없다. 배우들은 대부분의 장면에서 살기 넘치는 표정을 짓는다. 대사는 욕이거나 협박이거나 비아냥이다. 배우들은 물지 않으면 물리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수완 좋게 체현한다. 

<아수라>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영화다. 어떻게 찍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박진감 있는 차량 추격 장면은 ‘제이슨 본’ 시리즈가 부럽지 않다. 

촬영, 미술, 무술 등 각 분야의 유기적 협력이 빛난다. 배우들의 볼만한 연기와 스태프의 탁월한 기술력으로 132분의 상영시간이 꽉 차 있다. 

이제 기술적 성취가 뒷받침하는 철학을 물을 차례다. <아수라>는 지옥 같은 세상을 지옥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자비를 빌거나 법을 찾지 말라고 충고한다. 김성수 감독은 “일반적인 액션영화에서의 선악 구도나 정의가 이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폭력의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악인들만의 생태계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수라>는 우울한 세상에 우울한 전망 하나를 보탠다. 마치 먹물에 검은 잉크를 한 방울 떨어트린 것 같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지옥이니까 지옥이다” “끔찍하니까 끔찍하다”는 말같이 동어반복 아닐까. 상업영화에 세상에 대한 전망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순 없다. 그러나 <아수라> 속 폭력의 향연의 의미는 때로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