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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영화제 17관왕. <무산일기> 박정범의 2011년.

영화도 만들고, 외국 여행도 하고, 돈도 벌고. 박정범의 괜찮았던 2011년.

사진 잘 나왔다. 본인은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수염 깎고 왔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냥 안 깎는게 나았다. /김문석 기자



박정범(35)의 2011년은 특별했다. 그는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은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로 각종 국제영화제를 돌며 17개의 트로피를 가져왔다. 최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필름엑스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는데, 1주일의 일본 체류기간 동안 한국에서 열린 청룡영화제에 참석하느라 1박2일로 한국에 잠깐 나오기도 했다. 여름에는 “체력적으로 달린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비행기를 타고 또 내렸지만, 아무튼 전 세계를 돌며 상찬받은 셈이니 동료 독립영화인들에게는 올해 가장 부러움을 산 대상이다.

처음 나간 해외영화제는 지난해 12월 모로코에서 열린 마라케시 영화제. 박정범이 연출부로 참여한 <시>의 이창동 감독과 동행했다. 그곳에서 회고전을 연 이 감독은 제자가 대상을 타자 큰 덩치를 일으키더니 직접 사진을 찍으며 축하해줬다. 러시아에서 열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영화제는 1986년 타계한 명장 타르코프스키를 기리는 행사다. 타르코프스키의 누나가 여는 만찬, 그의 조감독이 안내하는 볼가강 1박2일 투어도 인상 깊었다.

그 유명한 충격과 공포의 헤어스타일. 자기가 직접 잘랐다고.

그가 사는 좁은 옥탑방에는 17개의 트로피를 둘 곳이 없어 4~5개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무산일기> 스태프에게 나눠줬다. 서울에 올 때마다 친구들의 독촉에 술 사는 게 일이었다. 그는 “남들은 상금을 엄청 모은 줄 아는데 <무산일기> 만들면서 진 빚을 갚을 정도”라고 밝혔다. <무산일기>의 제작비는 7800만원이었다. <무산일기>는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뜬 박정범의 탈북자 친구가 영화의 모티브다. 박정범은 그를 위해 단편 <125 전승철>을 완성했지만, 이미 사경을 헤매던 친구에겐 영화를 볼 기력이 없었다. <125 전승철>이 완성된 지 이틀 후 친구는 세상을 떴다. 이후 박정범은 오랜만에 접속한 미니홈피에서 생전 친구가 남긴 쪽지를 확인했다. “언젠가 형이 영화를 완성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의 격려였다. 이후 <무산일기>는 박정범의 숙제가 됐다.

2001~2008년 20여편의 단편을 만든 후 처음으로 완성한 장편 <무산일기>. 그러나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선 감독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연락이 와 출품을 권유했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출품한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인들에게 꿈의 무대와 같은 뉴커런츠 부문에 선정됐고 결국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아시아 최고의 영화를 찾던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은 이 자리에서 <무산일기>에 눈독을 들이고 박정범에게 앞다퉈 비행기 티켓을 보내왔다.

탈북자 이야기에 해외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까. 박정범은 <무산일기>가 “탈북자 이야기가 아닌, 북한이 고향인 한 친구의 이야기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이 사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만난 터키 출신 노동자는 “나와 내 친구들이 네덜란드에 처음 와서 겪은 이야기”라며 울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만난 중국계 노인은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영화 속 기독교도의 모습에 반성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미국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부유해 보이는 백인 관객은 “홈리스를 무척 싫어했는데, <무산일기>를 본 뒤 홈리스가 단지 가난하고 더러운 사람이 아니라 사연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박정범은 “내가 한 일(영화)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웃었다.

이 개와 함께 벌어진 일을 '올해의 엔딩'으로 꼽는 사람도 꽤 있다고.

<무산일기>는 감독이 직접 지켜본 이야기다. 감독의 체험에도 한계가 있을 터, 차기작도 데뷔작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박정범이 준비 중인 중편 역시 건설노동 아르바이트를 하며 체험한 내용이다. 이 역시 데뷔작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암울한 영화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그도 “언젠가는 밝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다만 이창동 감독의 조언대로 “돈 대준다고 빨리 찍다가 망하기보다는, 준비가 됐을 때 자연스럽게 찍으려 한다”고 밝혔다.

‘당신 영화의 원칙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던졌다. 박정범은 “가짜가 아닌 걸 하겠다”고 말했다. 또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는 영화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는 “돈이나 재미를 위해 등장인물, 내러티브를 이용하진 않겠다. 재미가 없더라도 진짜에 가까운 걸 하겠다”고 덧붙였다.

정신없게 1년을 보내다 보니 미처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한 대상이 뒤늦게 떠올랐다. 바로 부모님이다. 10년 가까운 무명생활 동안, 부모님은 박정범을 한 차례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산일기>에서 인정 많은 형사로 출연했고, 어머니는 촬영장을 지키며 스태프의 밥을 했다. 박정범은 “같이 시작한 친구 중에 지금까지 영화를 하는 이가 거의 없다. 부모님의 믿음 없이는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범은 “나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별로 없다”며 순박하게 웃었지만, 준비와 실력이 부족한 이에겐 운마저 찾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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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범 감독/김문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