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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영화의 최종판? '더 킹'과 한재림 감독 인터뷰


'더 킹' 시사 끝나자마자 극장 아래 스타벅스에 가서 후다닥 쓴 리뷰. 사실 이 리뷰 이후에도 '더 킹'에 대해 언급한 기획 기사를 몇 번 썼다.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예전에 자주 쓰던 말로) '징후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태수(조인성)는 목포의 시시한 건달의 아들이다. 양아치로 고교 시절을 보내던 태수는 아버지가 검사 앞에 굽실대는 모습을 본 뒤, 검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태수는 ‘서울 법대 입학→시위에 휘말려 군입대→사법시험 합격→검사 임명→마담뚜 소개로 부유한 집안의 아나운서 임상희(김아중)와 결혼’의 코스를 밟지만, 여전히 지방에서 하루 30건씩 시시한 범죄를 처리한다. 지역 유지의 아들을 성폭행범으로 잡아넣으려던 태수는 대학 선배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제안을 받는다. 사건을 덮으면 검찰 핵심 부서로 끌어주겠다는 것이다. 그 부서에는 굵직한 사건만을 맡아 처리하며 나라를 쥐고 흔드는 부장검사 한강식(정우성)이 있었다. 태수는 양심에 눈감고 강식의 수하가 된다. 아울러 고향 친구이자 ‘들개파’ 2인자인 조폭 최두일(류준열)과도 친분을 쌓아간다.

설날 전주인 18일 개봉하는 <더 킹>(감독 한재림)은 검사가 주인공이자 악당인 영화다. ‘조폭 같은 검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 킹>은 <내부자들>(2015), <검사외전>(2015) 같은 흥행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범죄영화의 주인공이 경찰이 아니라 검찰이라는 점은 최근 한국영화의 특성이기도 한데, 이는 한국의 영화 창작자들이 비대한 검찰 권력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줄거리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듯, 영화는 줄곧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어조를 유지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태수, 강식, 동철은 안동 하회탈이 대마초에 취해 웃고 있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차를 타고 가다가 큰 교통사고가 난다. 세 배우의 얼굴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는 와중에도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심각한 사회비판 드라마보다는, 좀 더 코믹하고 대중적인 해학극의 위치를 점유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최고 수준의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조인성, 정우성 두 배우는 늘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일한다. 두 배우는 일부 관객이 불편을 느낄 법한 욕설, 폭력을 직접 보이지도 않는다. 조인성이 간혹 내뱉는 욕설조차 살기가 있다기보다는 귀엽게 들린다. <아수라>의 일그러진 정우성이나, <내부자들>의 성적 묘사가 못마땅했던 관객이라면 안심해도 좋다. <더 킹>은 15세 관람가다.

‘진짜 힘’을 갖고 싶었던 태수는 강식을 자신의 멘토로 삼는다. 아직 일말의 양심을 버리지 못해 쭈뼛거리는 태수의 뺨을 후려치며 강식은 말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역사 앞에서 인상 쓰지마.” 이에 대한 태수의 답, “부장님, 씨X. … 러브샷 한잔 하겠습니다!”는 관객의 폭소를 자아내는 명대사 후보다.

<더 킹>은 조폭, 언론과 유착한다든지,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든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인들과 정보를 거래한다든지 하는 검찰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이미지를 재현한다. 검찰 개혁을 화두로 내세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게 굿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있다. 물론 영화는 이렇게 타락한 검찰이 ‘1%’라고 강조하긴 하지만, 여느 평범한 검찰 관계자가 이 영화를 본다면 말문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총제작비 134억원대의 상업영화가 이런 내용을 당당하게 담고 있다는 건 검찰에 대해 가진 대중의 인상을 보여줄 뿐이다.



한재림 감독(42)의 <더 킹> 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평소 늦게 잠드는 습관이 있는 그는 아침 일찍 전해진 노무현의 서거 소식을 비몽사몽간에 전해 들으며 소파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하루 종일 소파에 파묻혀 울었고, 이후 1주일간 우울의 늪에 빠졌다. “속 시원하게 정의를 이야기한 사람이 그들(주류 기득권층) 권력의 단단함 앞에 패배하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영화 속 잘나가는 검사 한강식(정우성)의 말이 ‘그들’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냥 권력 옆에 있어. 역사 앞에서 인상 쓰지 마.”

<더 킹>은 설날 연휴를 앞두고 개봉해 <공조>와 함께 ‘쌍끌이 흥행’을 이끌었다. 개봉 13일 만에 426만 관객을 모으며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한 순진한 검사가 권력의 단맛에 빠져 ‘왕’이 되려다가 좌절하는 이야기인 <더 킹>의 한재림 감독을 만났다. 

- <더 킹>은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다.

“기존 한국영화들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피해자 입장에서 봤다. 답답하고 힘들고, 영화가 끝나도 감정적 해소가 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보면서 무너지지 않는 권력의 성벽이 궁금해졌다. 노무현 당선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을까.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시스템을 이해하자’고 생각했다. 분노가 아니라 이성으로 그들의 시스템에 대응하자는 생각이었다.”

- 수양대군과 김종서 이야기를 다룬 전작 <관상>도 그렇고, 권력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조선시대부터 권력을 숭상하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 그런 것들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함을 낳고 있다. 반면 그런 인식을 비트는 쾌감도 있다. 대단하면서도 하찮은 권력의 양면성에 관심이 있다.” 

- 권력을 이야기하려면 재벌, 대통령도 있을 텐데 왜 검사였나. 

“관객이 스스로 권력에 다가서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 했다. 검사는 사법고시라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순식간에 권력에 들어간다. 반면 평범한 관객이 재벌,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다.”

<더 킹>의 핵심 장면은 펜트하우스에서의 파티다. 초임 검사 박태수(조인성)는 한강식이 주관하는 이 화려한 파티에서 초심을 버리고 권력에 투항한다. 아름다운 여자들과 잘 차려입은 남자들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태도로 순간을 즐긴다. 파티가 끝날 무렵엔 어디선가 불어온 깃털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 영화 분위기는 의외로 무겁다기보다는 코믹하다. 

“펜트하우스냐 룸살롱이냐 선택해야 했다. 후자는 혐오스럽고 거리감이 느껴지니, 전자로 가서 재미있고 경쾌하게 만들려 했다. 깃털처럼 화려하지만 금세 가라앉고 이후엔 쓰레기가 되는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 정우성, 조인성이 검사라니, 외모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조인성에게 역할을 제안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 있어 안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흔쾌히 응했다. 박태수는 한강식처럼 되고 싶어 한다. 한강식은 누가 봐도 ‘폼’이 나야 했다. 이런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며 천박하게 놀 때 그 아이러니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정우성이 ‘딱’이었다.”

- 박태수의 삶은 노무현과 겹친다. 별 볼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한때 권력의 맛을 본다. 그러다깨달은 바 있어 정치에 투신한다. 노무현이 서거한 날 박태수가 무너지고, 노무현 지역구였던 종로에 박태수도 출마한다. 

“노무현을 생각하면서 박태수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자유다.”

- 관객에게 말을 걸면서 끝나는 결말이 ‘낯간지럽다’는 말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바로 ‘우리한테 힘이 있다’는 그 말이다. ‘닭살’이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라도 위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