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판이 많고, 서술이 평이해 읽기가 수월했다.
그랜드 투어
설혜심 지음/웅진지식하우스/412쪽/2만3000원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현대인은 다독가다.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시대다. 한국에서도 해외여행은 30년전만 해도 특권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요즘은 동남아 정도라면 제주도 못지 않게 쉽게 갈 수 있다.
서유럽인들은 한국인들보다 이른 시기에 해외여행에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의미있는 경험을 쌓을만한 외국이라고는 중국밖에 없었을테지만, 같은 대륙에 각기 다른 문화를 가진 여러나라가 오밀조밀 붙어있는 서유럽에는 갈 곳이 많았다. 고대 로마의 부자들은 시골이나 온천 지대로의 휴가 여행을 ‘발명’했고,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세에는 성지로 순례를 떠났다. 중세 말기에는 기사들이 ‘모험’이란 명목으로 각지를 방랑하기도 했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가 다루는 여행은 방랑기사의 시대가 지나간 17세기 이후 유럽 엘리트 청년들이 떠난 ‘그랜드 투어’다.
그랜드 투어를 떠나는 이들, 즉 그랜드 투어리스트는 영국인들이 많았다.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이 통치하는 동안 영국은 유럽의 패권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힘이 세졌다해도 영국은 여전히 유럽 변방의 촌스러운 나라였다. 예술, 학문, 교육, 유행의 중심은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였다. 때마침 전쟁이 잦아들고 나라들 사이의 교통망이 정비됐다. 자신들을 억누르던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낀 영국의 엘리트들은 10대 중반~20대 초반 자녀들을 대륙으로 떠나보냈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연수 또는 유학이다.
물론 영국에도 대학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명문으로 불리는 케임브리지대나 옥스포드대가 그때 이미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대학은 중세로부터 전해진 진부한 커리큘럼을 반복해 학생들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부유한 귀족들은 대학이라는 ‘공교육’ 대신 해외여행 중의 아카데미 수학이라는 ‘사교육’을 신뢰했다.
그랜드 투어에는 평균 2~3년이 걸렸다. 여행 준비는 커다란 트렁크에 옷가지, 세면도구, 책 정도를 챙겨넣는 오늘날과는 차원이 달랐다. 해충 방지용 웃옷, 질긴 셔츠 12벌, 방수 바지, 여름용·겨울용 정장 2벌, 손수건 여러 장, 실크스타킹, 모자, 구두는 필수였다. 식기, 목욕통, 시계, 필기용 책상도 짐 목록에 들어있었다. 짚으로 채워진 침구를 내놓은 여관이 많았기에, 아예 침구를 챙기는 여행자도 있었다. 향신료, 의약품도 넣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온 물건까지 포함하면 짐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18세기 초 벌링턴 백작은 878개의 트렁크를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과거에 비해 안전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때의 여행길에도 몇 가지 위험이 도사렸다. 전염병, 해적, 강도에 주의를 기울였고, 자국민에게 사기를 치려는 이들도 조심해야 했다. 이 모든 준비사항과 여행지의 볼거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실용적인 여행서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는 혼자 세상을 떠돌기에는 미숙한 부잣집 도련님이었기에, 동행교사와 하인은 물론 의사까지 대동해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부모들은 아들이 현지에서 성적으로 방종해질 것을 우려해, 가난한 집의 딸을 ‘침실친구’로 동행시키기도 했다.
영국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의 여정은 대체로 비슷했다. 전체가 3년이라면 프랑스에서 먼저 18개월을 보낸 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 그곳에서 9~10개월을 머물렀다. 독일과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에서 5개월을 보낸 뒤, 귀국길에 파리에 들어 다시 4~5개월 체류했다. 역시 여정의 중심은 유행에 민감한 프랑스와 과거 유적이 찬란한 이탈리아였다.
그랜드 투어는 엘리트들의 교육과 인맥 쌓기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은 현지의 상류층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유행에 맞는 옷을 구해 입었고, 세련된 매너와 대화술을 익혔다. 복잡한 국제 정치의 와중에 언젠가는 다시 인연을 만들지 모르는 궁정 인사들을 만나야 했고, 루소, 볼테르 등 당대의 지식인들을 방문하는 것도 목표 중 하나였다.
이 길고 호사스러운 여행의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의 조기유학이나 어학연수가 그러하듯, 당시 영국에서도 그랜드 투어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적지 않았다. 3년 정도를 해외에서 머물렀는데 기대했던 외국어 학습 효과는 크지 않은 경우가 잦았다. 엄격한 부모의 곁을 떠난 혈기왕성하고 부유한 청년들이 벌일 수 있는 사고의 목록도 오늘날과 비슷했다. 자제심을 발휘해 선진 문물을 배우고 좋은 스승을 만나는데 집중한다면 모르겠지만, 많은 청년들은 환락에 빠져들었다. 도박으로 돈을 날리거나 현지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 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실제 1990년대 한국의 ‘오렌지족’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영국에선 그들을 ‘마카로니’라 불렀다. 영국인이 이탈리아에 가서 처음 맛보는 음식인 마카로니에서 이름을 따온 이 족속은 쓸데없이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 외국어를 섞어 대화하고, 호사스러운 옷차림을 즐기는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유학파 젊은이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런저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들은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일단 실제 효과가 있든 없든, 그랜드 투어를 다녀왔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인물의 주요 경력이 됐다. 왕족, 귀족이 모두 그랜드 투어를 다녀왔기에, 다녀오지 않으면 얼굴을 내밀기 힘들었다. 일단 국내 학위보다 미국 학위를 더 쳐주는 한국의 지성계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할까.
당대의 여행자들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훗날의 시선으로 볼 때 그랜드 투어는 오늘날 유럽인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그랜드 투어를 통해 지식과 사상이 전파됐다. 유럽 각국 상류층은 취향, 교양, 지식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자극해 지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이미 자국에서 명망을 누리던 문필가였던 괴테는 이탈리아에 첫 발을 디딘 순간 “다시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큰 감흥을 받았다. 존 밀턴은 이탈리아 체류 당시 종종 방문했던 문학회에서 얻은 영감으로 <실락원>을 썼다. 존 로크는 프랑스의 정부 체제, 재정에 대해 연구할 기회를 얻었다. 초기의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파리에 도착해 진정한 평등의 의미를 깨달았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만일 이 혁명이 귀족 계급을 완전히 파괴해 부유층 계급에게 자리를 내줄 뿐이라면, 그 변화가 사람들의 도덕을 크게 발전시키거나 부패한 정부를 정화시킬 것 같지 않아 두려워요”라고 말했다. 동행교사였던 애덤 스미스는 여행이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책을 한 권 썼다. 그것이 <국부론>이다.
‘취향의 발견’은 그랜드 투어의 또다른 효과다. 아름다운 회화, 조각, 연극, 음악 등은 이전에도 찬사를 받았지만, ‘예술’ 혹은 ‘고급 문화’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은 것은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과학혁명이 일어난 이후 “논증이 가능하고 누가 실험하든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을 과학이라고 일컫기 시작하면서, 이와 다른 예술에 대한 재정립이 시작됐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신흥 부유층인 메디치 가문은 예술품 수집을 통해 교양과 미적 감각을 과시했다. 예술품에 대한 감식안을 갖춘 사람을 ‘비르투오소’라고 불렀는데, 이는 훗날 ‘특별한 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로 확대됐다. 이제 부, 정치 권력을 넘어 ‘세련된 취향’은 지배 계급이 갖춰야할 필수 요소가 됐다.
물론 많은 이들은 홀로 높은 안목을 닦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이 안목은 어떻게든 밖으로 드러나야 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들은 현지 화가들에게 고색창연한 고대 유적지를 배경으로 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런 그림들은 고국에 돌아왔을 때 서재에 자랑스럽게 걸리는 ‘유학 증명서’ 노릇을 할 예정이었다.
요한 조파니의 '우피치의 트리부나'(1772~1778). 영국왕 조지 3세의 부인 샬럿은 직접 가보지 못한 피렌체 우피치 갤러리를 그림으로라도 보고 싶어해 이 그림을 의뢰했다.
여행은 문화의 충돌을 몸으로 체험하는 일이다. 과묵하고 엄숙한 영국인들은 프랑스 여자가 공공 장소에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가터를 다시 묶는 모습, 이탈리아 남자의 성적인 활달함에 충격을 받았다. 여행후 자국 문화의 우월함을 재확인하는 이도 있었고, 타문화에 대한 수용력을 넓히는 이도 있었다. 문화는 후자 쪽으로 나아갔다. “관습의 차이를 알고 현지의 관행에 맞출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시대”, 즉 ‘코스모폴리탄’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유럽’을 하나의 단위로 파악하는 인식도 이때부터 나타났다.
19세기 중반 기차, 증기선이 보편화돼 여행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자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해외여행을 꿈꿀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때부터 여행이 아닌 ‘관광’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평가한다. 신생국인 미국 남부 대농장주의 자제들이 뒤늦게 그랜드 투어의 대열에 동참했지만, 유럽에서 그랜드 투어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서유럽의 귀족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같은 운송수단으로 이동해 같은 관광지에 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상류층은 다른 게급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오지에 리조트를 짓기 시작했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또다시 다른 곳을 찾아 떠났다.
그랜드 투어를 상류층의 ‘구별짓기’ 또는 허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보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교육이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사람이 산다.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보는 것은 좁은 안목을 넓히고 고정된 세계관을 흔드는 계기가 된다. 적어도 그랜드 투어가 이 호텔에서 저 호텔로 옮겨다니며, 전세계에 깔린 체인형 식당 혹은 자국 식당을 찾아다니는 오늘날의 여행보다는 흥미로운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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