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런트 이슈'에 해당되는 글 33건

  1. 상식의 하한선 (4)
  2. 안티고네 혹은 사제의 일
  3. 왜 헬기는 안개 속으로 날아갔는가 (2)

매순간 빛나는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도, 상식의 하한선은 지키며 살아야 한다. 최근 구설에 오른 한 유명인의 인터뷰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되새겼다. 


함익병씨는 피부과 의사로 성공해 큰 돈을 벌었고, 최근에는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인기를 끌었다. 방송사는 50대의 그에게 연예대상 신인상을 안겼다. 문제는 그가 <월간조선>과 나눈 인터뷰가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찬사야 개인의 성향이다. 그의 재임기에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며, 많은 이들이 이를 박 대통령의 치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독재가 왜 잘못된 건가요?… 독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하나의 도그마입니다”라는 말을 읽고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한 명의 위대한 철학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다스리는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끌어오면서, 박 대통령의 독재도 ‘선의’와 ‘효율성’에 근거했으므로 나쁘지 않다는 논지를 편다. 그는 2500년전 그리스와 현대 한국의 차이를 모른 채 한다. 마치 박 대통령이 세상 다스리는 지혜를 홀로 터득한 철인이라도 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진짜 ‘폭탄’은 ‘국민의 4대 의무’를 언급하면서 터졌다. 그는 지금까지 딸에게 투표를 못하게 해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4대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투표권이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여자는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식을 2명 낳은 여자는 예외”라는 ‘너그러운’ 조건을 덧붙였다. 


19세기부터 수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내던지며 쟁취해낸 여성 참정권이 이렇게 간단히 부정된다. 한국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1948년이다. 지금까지 흐른 66년 세월조차 여성 참정권이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지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을까. 사회의 유명 인사가 여성 참정권을 부정하고, 시사 월간지는 이를 ‘유쾌한 직설’이라고 표현하는 상황이 오늘날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다. 



1913년 6월 4일 영국의 경마 대회 엡섬 더비가 진행되던 도중,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이 주로에 뛰어들어 말과 충돌후 사망했다. 영국 여성들은 이 사건으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에야 완전한 참정권을 얻어냈다. 


함익병씨에 대한 비판이 부당하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현대 사회에는 수많은 직업군과 전공 분야가 있으며, 각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익혀야할 지식의 양도 과거에 비해 방대하다. 경제학자가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에 대해 모른다고, 역사학자가 스티븐 호킹의 우주론에 대해 모른다고 타박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의학이란 고도의 정신적·육체적 숙련을 요구하는 분야다. 피부과 의사가 정치 체제, 여성 운동의 역사에 대해 과격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을지 모른다. 그가 지상파 텔레비전을 통해 유명세를 얻기는 했지만, 모든 분야에 대해 합리적이고 탁월한 의견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윤리, 상식에도 하한선이 있다. 이것은 수학의 공리 같은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에 대해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이 한 사회가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규칙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윤리와 상식들을 오랜 기간, 다수의 협의를 통해 정립해왔다. 이것은 어떤 이가 해당 분야에서 쌓아온 업적의 탁월성 여부와 관계 없이 지켜야 하는 기본이다. 예를 들어 어느 뛰어난 재능의 소설가가 “현대 사회의 질병은 모두 서구 의료산업계의 음모에 의해 발병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중요한 이론을 만들어낸 물리학자가 “아동 노동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업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를 한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품격있는 인사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 사람되긴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맙시다.” 상식의 하한선을 넘는 사람이 유명세를 타거나 심지어 존경받는 사회는 불길하다. 그가 주변에서 아무리 좋은 친구, 남편, 딸, 사위로 받아들여진다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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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그리스 비극작가의 작품 6편이 선별 수록된 <그리스 비극 걸작선>(천병희 역/숲) 중에서 가장 마음을 움직인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였다. 기원전 441년쯤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사후의 일을 다룬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왕권을 두고 다투었는데, 이 과정에서 폴뤼네이케스는 적국을 끌어들였다. 결국 형제는 전장에서 모두 죽고, 크레온이 새 왕으로 등극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게는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되, 조국을 배신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은 들짐승과 날짐승이 먹어치우도록 내버려두라고 명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친오빠의 시신을 장사 지낸다. 크레온은 왕명을 어긴 안티고네에게 분노하고 처형을 명한다. 


명색이 '고대'라 분류되지만, <안티고네>를 보면 당시에도 국가 권력은 꽤나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왕'인 전제군주 시대였지만, 크레온은 안티고네가 자신의 뜻을 여긴 것만큼 국가의 반역자를 도왔다는 점을 괘씸하게 생각한다. 끌려온 안티고네는 왕의 추궁에 당당히 답한다. 


안티고네 "제 혈족을 존중하는 것은 결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크레온    "그자(폴뤼네이케스)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분(에테오클레스)도 네 혈족이 아니더냐?"

안티고네 "같은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혈족이지요."
크레온    "그렇다면 너는 왜 그자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분을 모욕하지?"

안티고네 "세상을 떠나신 분은 그렇다고 시인하지 않을 거예요."

크레온    "네가 그 불경한 자를 그분과 똑같이 존중하는데도?"

안티고네 "세상을 떠나신 분은 그분의 노예가 아니라 아우예요."

크레온    "그자는 이 나라를 유린하다가, 그분은 지키다가 전사했다."

안티고네 "아무튼 하데스는 그런 의식을 요구해요."

크레온    "그래도 착한 이에게 나쁜 자와 같은 몫이 주어져서는 안 되지."

안티고네 "하계에서는 그것이 신성한 규칙인지 누가 알아요?"

크레온    "적은 죽어도 친구가 안 되는 법이지."

안티고네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려고 태어났어요."


크레온은 왕의 명령, 국가의 질서, 이승의 규칙을 강조한다. 이곳에선 조국의 반역자를 기려서는 안된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고, 각자에겐 응분의 보상과 징벌이 따라야 한다. 물론 그 선악이란 국가에 얼마나 충성했는지에 달려 있다. 반역자나 적은 죽어서도 친구로 삼을 수 없다. 이곳은 그런 곳이다. 


안티고네는 세상의 법을 따를 생각이 없다. 조국을 배신한 자일지라도 그와의 핏줄은 하늘이 맺어줬다. 안티고네는 세속의 선악 기준조차 믿지 않는다. 인간이 '악'으로 규정하는 행동이 신이 보기에도 '악'일까. 인간의 법, 규칙, 명령을 어기거나 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증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안티고네는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폴뤼네이케스의 시신 앞에 선 안티고네. 니키포로스 리트라스 작. 


세속의 법 대신 천상의 질서에 복무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사제라고 부른다. 안티고네의 행동은 사제의 한 역할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천상의 질서를 따르는 과정에서 지상의 법을 어길 경우도 있다. 그래도 사제라면 지상의 법을 어기길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한 나라의 사람 모두가 그를 기이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사제는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천상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슬람권의 몇몇 국가를 제외한다면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세속주의를 따르고 정교분리 원칙을 지킨다. 보편의 여론을 어기면서까지 신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제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을 그를 광신자라 부를 것이다. 광신자에게 세상을 흔들만큼 강한 수단이 주어졌을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옴진리교의 사린 가스 테러가 한 사례다. "지금 세상은 썩었기에, 새 세상을 열기 위해선 이 세상을 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사제가 있다면, 국가는 그를 요주의 인물로 여길 것이다. 옴진리교처럼 테러라도 계획한다면, 국가는 그들을 탄압할 것이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것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오불관언'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했다.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목사도 있었다. 그는 "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기실 영혼의 평화와 사회의 정의는 분리돼 생각할 수 없다. 불의로 가득찬 세상에서 제 영혼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 영혼은 순수한게 아니라 마비된 것이다. 


세상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제에게 '정교분리'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사제가 잘못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사제의 말이 보편의 생각을 거슬렀을수도 있다. 나 역시 현 정권을 '제2의 유신'이라거나 '독재정부'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 사제의 인식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비판에 대해 "묵과하지 않겠다"고 답하는 지도자에게 있으며, 진정 정교분리의 원칙을 어긴 이들은 지난 정권 당시 권력자에게 빌붙어 영향력을 행사하려한 대형 교회 사람들이다. 


안티고네는 처형됐다. 그리고 그 처형은 줄줄이 또다른 비극을 불러왔다. 안티고네에겐 군대도, 돈도 없었다. 그저 혈육을 장사 지내려는 마음밖에 없었다. 한국의 늙은 사제에겐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대통령에겐 없는 것이 무엇일까. 모든 것을 가진 권력자가 아무 것도 없는 사제를 윽박지르는 풍경은 늦가을처럼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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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자욱하게 낀 토요일 아침, 잠실헬기장에서 대기업 임원을 태우고 지방 공장으로 가기로 했던 헬기가 헬기장에 도착하기 전 서울 삼성동의 고층 아파트에 부딪힌 뒤 추락했다. 주민들은 무사했으나, 헬기 조종사 2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고의 원인이 담긴 블랙박스는 현장에서 곧바로 수거됐다. 분석 작업에는 6개월이 걸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6개월을 기다리는가. 단언컨대, 6개월 뒤 이 사건의 원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커녕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언론은 이런저런 취재를 근거로 사고 원인을 '추정'한다. 물론 이 추정은 근거가 충분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김포공항에서는 이륙 허가를 내줬다. 안개가 짙었으나 규정상 이륙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안개는 불균질하다. 짙었다가 옅여지고 다시 짙어진다. 게다가 목적지였던 잠실헬기장은 유달리 기상 변화가 심한 곳이다. 김포에선 3마일이던 시정이 잠실에 도착해선 1마일도 안되는 경우도 있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헬기가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고층 아파트를 들이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 전용기를 몬 경험이 있는 베테랑 조종사들은 왜 그 자욱한 안개 속에 비행을 감행했을까. 고층 건물이 즐비한 강남에서 그토록 낮게 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수의 조종사들의 언급을 종합하면, 기체 이상보다는 기후 이상에 의한 사고로 의견이 모인다. 일각에서는 아이파크 옥상에서 누군가를 태우려다가 사고가 났다는 의혹도 제기됐으나, 신빙성이 떨어진다. 일단 아이파크 옥상엔 원칙적으로 사고 헬기 크기의 기체가 상륙할 수 없다. 평소 이 아파트 옥상에 헬기가 착륙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다. 아이파크 같은 아파트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아무리 고층, 고급 아파트라도 그 옥상에서 헬기가 내리고 뜨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당장 또다른 상류층 주민들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참고 있겠는가. 


아이파크 아파트 헬기 충돌 사고 현장/ 김기남 기자



토요일 오후 도착한 아이파크 사고 현장은 철저히 통제됐다고 한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통제됐다고 들어갈 수 없는 건 아니다. 때론 취재를 위해 법을 어기는 걸 감수해야할 때도 있지만, 이번 건은 그 정도로 거창하고 비장하게 말할 것도 아니다. 단지 약간의 요령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이 기자로서의 스킬이다. 


피해 주민들은 곧바로 인근의 특급 호텔로 안내됐다. 아이파크 아파트가 아니었어도 그랬을까. 만약 5층짜리 주공아파트 주민의 피난처로도 특급 호텔이 제공됐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안개가 짙어 목적지까지 가기가 어려우면 헬기는 잠시라도 쉬어갈 곳을 찾는다. 문제는 잠실헬기장 인근엔 착륙할 곳도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그래도 사고기 조종사들은 베테랑 아닌가. 베테랑이란 어떤 악조건에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한 사람 아니던가. 어느 조종사는 이렇게 말했다. "베테랑?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백만 가지 중 하나만 잘못되면 사고로 연결되는게 비행이다." 또다른 조종사는 말했다. "천재지변 앞에는 베테랑이 없다." 자연이 내려준 어떤 상황에서는 100시간이든 1000시간이든 10000시간이든 인간의 경험은 무의미하다. 


한국 대기업의 문화를 거론하는 이도 있었다. 사고 헬기가 소속된 기업 관계자는 사고기 기장이 임원급 대우를 받았으며, 모든 비행에는 기장의 판단이 최우선으로 반영된다고 말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해도 목숨을 걸고 비행을 지시할 리는 없지 않겠냐는 얘기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느 조종사는 다른 톤으로 말했다. "민간은 돈이다. 가자고 하면 가야한다. 못간다고 하면 자존심 건드린다."


사고가 일어났고 2명이 죽었다. 그 원인은 모른다. 우리는 우유 같은 안개 속을 더듬어 몇 가지 파편을 모은다. 더듬더듬. 이것이 지금까지의 그림이다. 부지런하고 운좋은 다른 누군가가 큼직한 파편을 모으면 또다른 그림을 그리겠지. 


사회부에 온 뒤로 처음 경험한 '사건'이다. 또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죽음을 만날까. 우리는 그 죽음의 의미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모든 죽음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멀찌감치 다가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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