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미지

배우 김태리 인터뷰+'아가씨' 리뷰





영화 '아가씨'의 초반 흥행이 좋은 편이다. 개봉 6일만에 200만 돌파. 150억원대로 알려진 총제작비를 고려하면 손익분기점은 500만 가량으로 보인다. 해외 수출이 많이 됐다고 하니 실제로는 그보다 낮을 수도 있다. 


<아가씨>에서 히데코(김민희)는 ‘잠들기 전 생각나는 얼굴’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하녀 숙희 역을 맡은 신인 김태리(26)는 어떨까. ‘누구세요?라고 묻고 싶은 얼굴’ 정도가 아닐까.

1500 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처음 출연한 장편영화의 연출이 그 유명한 박찬욱 감독이었고, 남들은 평생 연기해도 못 밟을 수 있는 칸국제영화제 레드 카펫을 걸었다. 그런 배우의 프로필을 찾아봤는데 최종 학력, 단편영화 1편 정도가 전부다. 이 배우의 정체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의 배우 김태리를 최근 만났다.


배우 김태리 /이석우 기자




“낙천적인 사람이었어요. 생각 없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 살았어요.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안되면 어쩔 수 없고…. 딱히 모범생이었던 건 아닌데, 막 놀지도 않았고….”

박찬욱 감독이 망설이지 않고 김태리를 낙점한 것도 그런 이유 아닐까. 극중 숙희는 나쁜 의도를 갖고 접근한 대상과 사랑에 빠져야 하고, 입으로 내는 대사와 속내를 보이는 표정이 달라야 하고, 동성 배우와 베드신까지 소화해야 하는 역이었다. 그 복잡하고 어려운 역을 해내기 위해선 미리 걱정해 공포에 빠지기보다는 천진난만하게 상황을 즐길 줄 아는 성품이 필요했을 것이다.

생각도 없던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연극반 때였다. 단 한 번도 미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운 적 없던 김태리는 그때 “배우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결정해버렸다. 배우란 캐스팅되지 않으면 그만이고, 정상의 자리는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며, 무엇보다 연기 자체가 보통의 노력과 재능으론 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김태리는 막연히 생각했다. “하다보면 언젠가 좋은 배우가 되겠지. 시간이 답이다.”

대학 졸업 후 대학로의 극단 이루에 들어갔고, 2014년엔 소속사에 들어가 영화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탈락이 이어졌지만 크게 상심하진 않았다. “살갗으로 오지 않으면 걱정은 하지 않는 편이에요. 가족과 함께 사는 집도 있고 먹을 밥도 있었어요. 연극 하면서 용돈은 벌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박찬욱 감독은 김태리의 주눅 들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시나리오가 이해되지 않을 때마다, 감정이나 동작이 모호할 때마다 묻고 또 물었다. 신인 배우로선 어려운 일이다. 김태리는 “모르면 할 수 없으니까, 알아야 잘 하니까 그랬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극단 막내로 스태프할 때도 연출에게 물어봤네요. ‘왜 조명이 이렇게 들어가요?’ 그러면 연출도 잘 모를 때가 많아요(웃음). 느낌으로 연출하는 거니까. 박찬욱 감독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음, 왜 그럴까. 같이 생각해보자’고 하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도 김태리는 천생 신인이다. 이번 칸영화제에서도 세계 언론과 영화팬의 시선을 유유히 즐기는 단계엔 서지 않았다. 간혹 칸의 거리나 행사장에서 마주친 김태리는 도도한 여배우라기보다는 들뜬 영화팬 같았다. 김태리는 <아가씨> 공식 일정이 끝난 뒤 칸에 남아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네온 데몬>, 크리스티안 문주의 <바칼로레아>를 봤다고 했다.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자리란 걸 잘 아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아직 마음속 깊이 감동하기엔 경험이 일천하달까요. 나중에 경험을 많이 하고 다시 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레드 카펫 위를 걸을 때보다 혼자 영화 볼 때가 더 즐거웠어요. 아, ‘한국 영화의 밤’에서 정유미 선배도 만나 인사했어요. 제가 <가족의 탄생>의 정유미 선배 역할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아가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달라고 하자 “‘두 번 보면 좋은 영화’라는 표현은 좀 식상하고…. ‘소장용 영화’가 어떨까”라고 답했다. “편한 마음으로 보러 오세요. 어려운 영화 아니에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귀족 히데코(김민희)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다섯 살 때 조선땅에 와 후견인인 이모부(조진웅)의 보호 아래 살아간다. 백작을 자처하는 사기꾼(하정우)은 히데코와 결혼해 재산을 가로채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위해 소매치기 고아 숙희(김태리)를 히데코의 하녀로 들여보내 자신과의 결혼을 유도하도록 한다. 하지만 숙희와 히데코 사이엔 예기치 못한 감정이 싹튼다.


배우 김태리/ 이석우 기자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10번째 장편 <아가씨>를 설명하기 위해 “깨알 같은 잔재미가 가득” “아기자기” “모호한 구석이 없이 후련” “해피엔딩” 같은 수식어구를 동원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박찬욱의 설명처럼 팝콘을 먹으면서 편히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엔 박찬욱식의 냉소가 묻은 잔가시가 가득 박혀 있다. 상황과 대사에 유머가 산재하지만, 즉각적인 폭소를 유발하진 않는다.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 잔혹한 장면도 있고, 한국의 상업영화에선 본 적이 없는 대담한 여성 동성애 장면도 있다.

무엇보다 영화의 형식적 특성이 관객의 쉬운 접근을 막는다. <아가씨>는 하녀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1부, 아가씨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2부, 둘의 이야기가 합쳐지는 3부로 구성돼 있다. 숙희가 히데코의 하녀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은 ‘다짜고짜’라 해도 좋을 정도로 급속히 전개되지만, 이후 숙희와 백작에 얽힌 사연을 과거 회상 형식을 통해 몇 번이나 곱씹는다. 2부는 1부에서 대략 전개한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점에서 재차 보여준다. 한 가지 사건을 복수의 시점으로 다시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가씨>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고전 <라쇼몽>을 떠오르게도 하지만, 이러한 형식 자체가 대중에게는 여전히 어렵게 여겨질 수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힘차게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서사에 익숙한 관객에겐 낯선 관람 경험이 될 법하다.

<아가씨>는 철저한 계산과 정교한 손길로 빚어진 고급스러운 자기 같은 영화다. 영국식과 일본식 건축양식이 혼재된 대저택 세트는 그 자체로 볼거리다. 히데코가 이모부를 비롯한 신사들 앞에서 펼치는 낭독회 장면에선 일본 전통 공연을 연상케 하는 절제된 양식미가 넘친다. 겉으로 드러난 호의와 속으로 감춘 음모, 그 사이에 피어난 애정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나무랄 데 없다.

‘브로맨스’만이 넘치는 한국 영화계에서 자매애를 다룬 총제작비 150억원대의 영화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고 사건이다. 이는 ‘박찬욱’이라는 브랜드 덕에 가능한 일이다. <아가씨>의 포스터는 네 배우를 공평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주연은 어디까지나 두 여배우다. ‘젖이 나오면 아기들에게 다 먹여주고 싶은’ 강한 모성애를 가진 숙희와 세상 물정 모르는 아기 같은 히데코 아가씨의 조화가 흥미롭다. 처음엔 남성들의 욕망 아래 자신들의 욕망을 감췄던 두 여성은 곧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터득한다. 하정우, 조진웅 두 남자 배우는 음란하고 잔혹하고 위선적이며 지질하기 이를 데 없는 남성상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국 작가 새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