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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케리아트여, 단결하라. <다크 나이트 라이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아이맥스로 2차례 보았다. 한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이나 본 경험은 별로 없는 듯 하지만(아, <인셉션>도 두 번 봤구나), 오늘이 오프라 영화를 한 편 보고 싶은데 달리 보고 싶고 시간이 맞는 작품이 없었다. 안내키는 영화 볼 바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다시 봐도 괜찮겠다 싶었다. 첫번째 관람 후 영화에 대해 조금 투덜대긴 했지만, 아이맥스로 본 시각 경험은 괜찮았다. 앞으로 이 영화를 아이맥스로 볼 기회는 사실상 없지 않은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첫번째 배트맨 영화, 즉 <배트맨 비긴즈>에선 거의 느끼지 못했고, 두번째 영화 <다크 나이트>에선 조금 느꼈던 그의 우파 성향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조금 놀랐다. 물론 우파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고. 


베인과 그의 '군대'는 확신범들이다. 단지 생계가 아니라 신념을 위해 범행을 저지르고, 이를 위해선 스스로를 희생하길 두려워하지 않는다.(영화 초반 비행기 납치 장면에서 베인의 부하 중 한 명은 "시신이 잔해에서 발견돼야 한다"는 베인의 말을 웃으면서 따른다. 혁명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이들은 하수구에 마련된 기지에서 준군사집단을 만들어왔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폭력 혁명이다. 이 혁명 집단의 구성원은 전통적인 운동권 세력인 노동자, 농민, 학생이 아니다. 고아, 부랑자 등을 비롯해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된 자들, 요즘 쓰는 말로 프리케리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고담이라 부르지만 뉴욕임이 분명해 보이는 영화 속 도시에서, 베인의 수하들이 제일 처음 치는 곳은 의미심장하게도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다. "훔처갈 것이 없다"는 거래소 직원의 말에, 베인은 "너희들은 잘도 훔치지 않느냐"고 답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통상적인 제작 기간이라든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후반 작업 시간을 고려할 때,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이미 몇 년 전에 쓰여졌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가 일어난 것이 지난해 9월이니, 광산 속 카나리아 같은 우파 예술가의 불안한 예지력은 이 운동의 발발 조짐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는 소리겠다. 베인은 고담(뉴욕)을 통째로 인질로 잡고 권력 체제의 역전을 시도한다. 미식축구장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 그들이 처음 공격에 나선 곳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소 불법 또는 초헌법적으로 감금해둔 범죄자들이 모인 교도소. 베인은 기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그 교도소를 "압제의 상징"이라 부르며 배트맨에게서 빼앗아온 무기로 정문을 부서버린다. 프랑스 혁명 역시  상징적으로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했다지?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그러나 아무리 베인이 낭만적이고 순정한 남자라 하더라도, 이 프리케리아트 혁명가 집단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블록버스터에서 분명한 악당의 위치를 점한다.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산 고담(또다시 뉴욕 혹은 전세계) 부유층의 재산을 털고, 기존 군대와 경찰을 무력화하고, 새 법을 만들고, 그래서 명백히 사회주의 혁명기의 인민재판을 연상시키는 군중재판을 열어 기존 체제에 부역하던 자들에게 '추방 혹은 사형'을 언도한다. 계급적으로는 브루스 웨인보다는 베인에게 훨씬 가까울 듯한 셀리나, 즉 캣우먼조차 베인 집단이 일으킨 가치 전도, 체제 전복의 혼란기에 염증을 느끼는 듯 하다. 


기존의 정치, 경제 체제는 어떻게 수호되는가. 배트맨 영화이니 당연하게도 브루스 웨인이 답이다. 이 괴짜 억만장자는 재력과 지능으로 고담시를 구하라는 충실한 집사 알프레도의 조언을 무시하고, 불편해 보이는 망토를 두른 채 직접 범죄자를 잡겠다고 뛰어 다닌다. 만약 이건희에게 사회정의를 세우겠다는 엄청난 열의가 있다면, 그는 경찰력을 개선하는데 돈을 대거나 사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재단을 만들어 그들이 혹여 범죄를 저질러야할만큼 궁색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편이 나을거다. 그러나 고담시의 이건희는 그 돈으로 온갖 신기한 무기를 만든 뒤 그것을 이용해 직접 범죄자를 막겠다고 나선다. 



빈자 대 부자. 혁명군 대 (유사)정부군. 


배트맨은 8년간 은퇴한 상태였다. '바깥 세상과의 고리'인 연인을 잃고 상심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인으로 대표되는 '악'이 창궐한다. 우리의 선량하고 순진한, 그러나 집요한 베테랑 경찰 고든은 병실에 누워 말한다. "배트맨은 돌아와야 해." 허나 고든 청장님. 악이 체제를 좀먹는게 아니라 체제 자체가 악이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어쨌거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신경질적인 텍스트다. 지금의 고장난 자본주의 체제에는 온전히 작동하게끔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으며, 체제 수호는 오직 세상에 단 한 명뿐인 괴짜 백만장자의 편집증적인 정의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나. 배트맨은 인간이고, 인간은 죽을테니. 제2의 베인, 제2의 조커가 나타날 가능성은 많지만, 제2의 배트맨이 나타날 가능성은 그보다 적으니. 정의감, 직관, 지능은 있지만 결정적으로 돈은 거의 없는 로빈으로는 좀 힘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