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M T 앤더슨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돌베개)을 읽다. 흥미진진한 서술, 뚜렷한 관점,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자료의 측면에서 모범적인 논픽션이다. 위대한 작곡가의 삶에 대한 책이자, 2차대전 전쟁사이며, 소비에트 정치 비판서다. 546쪽에 이르는데, 책을 무겁지 않게 만든데다가 번역이 매끄러워 수월하게 읽힌다.  

 

책 초반부는 간략하게 요약된 쇼스타코비치의 성장기, 1920~30년대 소비에트의 분위기와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다. 쇼스타코비치가 10살이던 1917년 러시아엔 레닌이 주도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여느 러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 일가 역시 혁명의 흐름에 발을 담근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가 작곡가로서 입지를 넓혀가던 시절 등장한 지도자는 '강철 인간'이란 뜻의 스탈린이었다. 1920~30년대 프랑스가 그러했든, 소련으로 다시 태어난 러시아에서도 구습을 하루 아침에 벗어던진 새로운 예술이 일제히 나타났다. 지금 들어도 전위적인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비롯해, 마야코프스키의 미래파 시,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회화가 등장했다. 불과 5년 전에 접했던 그 어떤 음악, 시, 회화와도 다른 작품들이 시민들의 감각을 폭격했다. 하지만 레닌은 혁명에는 능숙하지만, 경제계획에는 서툰 사람이었다. 이전의 모든 예술과 전혀 다른 예술을 받아들일만큼 열려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마야코프스키는 권총을 들고 자신의 심장을 쐈다. 그는 "제 손으로 건설은 거든 세상에서 더는 참고 살 수 없었다." 소비에트의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자신이 세운 미래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레닌의 뒤를 이은 스탈린은 한층 강력한 독재자였다. 이미 소비에트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고, 서방 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러시아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여겨진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성공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미래는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 작품을 관람하다가 중간에 나가면서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긴다.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다." 어제까지 쇼스타코비치를 칭송하던 비평가와 언론과 친구들은 하루 아침에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불협화음'이고 '노래 대신 비명'이며, 인민이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 비판했다. 전위적인 곡은 어렵다고, 달콤한 곡은 얄팍하다고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친구, 지인들이 하나 둘씩 알 수 없는 이유로 비밀경찰에게 끌려갔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언제 끌려갈지 몰라 매일 밤 여행용 가방을 챙겨두고 잠이 들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비밀경찰에게 소환돼 혹독한 심문을 받을 위기에 놓였으나, 자신을 조사하기로 한 조사관 역시 체포되는 '행운' 덕에 살아남았다. 

 

책의 중후반부는 나치 독일의 소비에트 침공과 그에 이은 레닌그라드 포위를 그린다.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살았고 언제나 이 도시를 사랑했던 쇼스타코비치는 피난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도시를 지킨다.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 의해 완전히 둘러 쌓여 872일동안 봉쇄된다. 포위 초기에 식량 창고가 불타고, 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근에 빠졌다. 책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한 별 이상한 방법이 다 나오는데, 짐작할 수 있게도 최종적으로는 인육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시신을 매장하지조차 않는 일이 벌어졌기에, 허벅지와 엉덩이살은 누군가 베어가곤 했다. 그나마 시신의 살이라면 다행이고, 적발돼도 가벼운 벌을 받았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고향의 처지를 위해 7번 교향곡을 만든다. 일부 테마가 전쟁 이전에 작곡됐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튼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은 고향의 수난과 곧 다가올 승리에 대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 이 교향곡은 2차대전 당시 소비에트 인민의 사기를 높였고("보라, 이렇게 혹독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토록 복잡하고 위대한 교향곡을 만든다!"), 악보가 미국, 영국 등으로 수송돼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기도 한다(미국 초연은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NBC 오케스트라가 연주). 봉쇄된 레닌그라드에서도 결국 곡이 연주됐다. 하지만 레닌그라드에 남은 소수의 연주자는 이 길고 복잡한 곡을 소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연주하다가 쓰러져 죽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의지를 발휘해 연주했고, 소비에트 군은 불 켜진 콘서트홀이 독일군의 표적이 되는 걸 막기 위해 공연 시작전 독일군 쪽으로 집중 포격을 했다. 

 

7번 교향곡은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쇼스타코비치는 다시 조국의 영웅이 됐지만, 국가는 그를 편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후에도 쇼스타코비치는 당국과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쇼스타코비치는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