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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이슈

조성진의 음악은 조성진의 것




며칠간 집에 와서 조성진의 쇼팽 피아노 콩쿠르 음반을 들었다. 전주곡이 좋았고, 소나타는 조금 낯설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칼럼을 썼다. 




조성진의 제17회 쇼팽 피아노콩쿠르 우승 실황 음반을 들었다. 24곡의 전주곡을 차례로 연주한 뒤 녹턴, 소나타, 폴로네즈 등을 조금씩 들려줬다. 콩쿠르는 세계의 젊은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짧은 시간에 실력을 뽐내는 대회다. 대회 특성상 열정적이고 다소 과시적인 연주가 나오지 않을까 짐작했다. 예상과 달랐다. 순진한 표정의 21세 피아니스트는 오히려 차갑고 절제된 연주를 들려줬다. 


조성진의 연주는 차분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초도 발매된 음반 5만장은 1주일 만에 매진됐다. 발매 당일에는 새벽부터 음반 매장에 줄을 선 이들도 있었다. 통상 클래식 음반은 많이 팔려봐야 2000~3000장이지만, 음반사는 조성진 음반의 판매량을 10만장까지 내다보고 있다. 


지난달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어떤 신문은 한창 뜨거웠던 국정 교과서 공방을 제쳐두고 우승 소식을 1면 톱기사로 전했다. 콩쿠르 우승을 올림픽 금메달에 견주기도 했다. KBS는 조성진의 우승자 갈라 콘서트와 본선 연주를 이틀에 걸쳐 방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축전을 보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특별상을 수여했다. 1974년 정명훈이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한 뒤 김포공항부터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인 것에 비견되는 열기다. 





조성진 열풍은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피아니스트 문지영의 부조니 콩쿠르 우승 때의 차분했던 분위기와 비교된다. 둘 다 올해의 일이고, 한국인 최초였다. 특히 조성진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문지영은 올해 부조니와 쇼팽 콩쿠르를 모두 준비하다가 부조니에서 우승한 뒤 쇼팽을 포기했다. 부조니의 권위가 쇼팽 못지않다는 뜻이다.


2000년 제14회 쇼팽 콩쿠르에서 18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쥔 윤디 리는 지난달 내한공연 중 대형 사고를 쳤다.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다가 박자를 놓치는 등 실수를 연발한 끝에 연주를 일시 중단한 것이다. ‘쇼팽 스페셜리스트’인 윤디 리에게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수천번 쳐봤을 레퍼토리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다. 윤디 리는 황당한 실수를 저지른 그날 밤 핼러윈 분장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번 쇼팽 콩쿠르 심사 중에는 며칠간 자리를 비운 뒤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친구 연예인 부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랑랑과 함께 중국의 슈퍼스타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그가 쇼팽 콩쿠르 우승 15년 만에 실력과 정신력 면에서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


15년 뒤의 조성진은 어떨까. 물론 예술가가 온전히 독립적인 존재라는 믿음은 환상이다. 바흐와 모차르트는 종교의 광휘, 귀족의 희열을 위해 곡을 썼다. 자유분방한 시민 작곡가로 여겨지는 베토벤도 사교계 귀족의 후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오늘날의 클래식 음악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많은 연주자들이 현대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기업(인)의 후원에 기대 음악 활동을 펼친다. 언론의 조명, 대중의 반짝이는 눈빛은 덤이다. 


하지만 예술가는 궁극적으로는 혼자다. 내면의 심연에 침잠한 뒤에야 사회와 연결된 길을 찾을 수 있다. 조성진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유명인이 되기보단 훌륭한 음악을 연주하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난 그가 자신의 말을 지켰으면 한다. 조성진이 국가의 영광을 위해 피아노치지 않길 바란다. 대중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길 바란다. 


조성진의 음악은 조성진의 것이다. 피아노 연주는 손가락 훈련을 넘은 마음의 도야이기에, 그 자신만을 위한 오롯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성진을 아주 가끔씩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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