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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단평, <엄마 교과서>, <만년>, <우게쓰 이야기>, <죽음과 섹스> 외 1.

업무 외에 재미로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해 간단하게 남긴다. 길게 쓸 여유가 없고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엄마 교과서>(박경순/비룡소)

'아기랑 엄마랑 함께 행복해지는 육아'와 '정신분석학자가 전하는 스트레스 0%의 행복한 육아법'을 전하는 실용서인척 하지만, 사실 어린이에 대한 정신분석 서적에 가깝다. 편집과 마케팅 과정에서 출판사, 편집자의 의도가 많이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아기를 키우는 부모를 위한 실용적인 조언이 없지는 않지만, 인문학으로서의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더 많은 지적 자극을 줄 것 같다. 프로이트의 그 유명한 구분,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에 대해 임상적으로 설명을 하고,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콧 등 유명한 정신분석가의 이론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한다. 아이의 공격성에 대한 대처법, 발달 단계를 충분히 거쳐야 온전한 인격이 될 수 있다는 전언 등은 새겨들었다. 


<만년>(다자이 오사무/도서출판b)

10권으로 나올 예정이라는 다자이 오사무(1909~1948) 전집의 첫번쨰 권이다. 많은 일본 작가가 그러하듯이 별 이유 없이, 아니면 필연적인 이유로 자살한 이 작가의 작품이 최근 다시 일본에서 읽히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허무하고 무력한 분위기가 요즘 일본의 젊은 독자들의 상황과 감성에 가닿기 때문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본 소설은 대체로 그런 분위기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릿광대의 꽃>은 자살 시도 후 회복이라는 자전적인 경험을 그렸고,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는 하는 일 없이 살면서도 근심은 없어 보이는, 그러나 노장적 의미에서의 소요가 아니라 그저 한심해 보이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다. 특히 후자의 경우 명확한 줄거리가 없어 하나마나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다자이는 그 무력한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능숙한 재주를 보인다. 본인이 그렇게 살았나. 그런데 평생 그렇게 살았으면 소설 따위 쓸 힘도 없었겠지. 


<우게쓰 이야기>(우에다 아키나리/문학과지성사)

전자책 기계가 생긴 김에 전자책을 읽어보려다가 이 책이 있기에 사서 지하철을 오고 가며 읽었다. 이 책에 한정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특성상 각주가 많은데, 주가 다른 페이지에 가서 그것도 페이지 중간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래서야 부드럽게 읽어나갈 수 있겠는가. 

<우게쓰 이야기>는 영화팬들에겐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국학연구자였던 우에다 아키나리(1734~1809)는 중국 고전을 번안하거나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엮어 이 설화집을 펴냈는데, 대표작격인 '잡초 속의 폐가'가 그러하듯이 "자고 일어나니 꿈일런가 하노라" 하는 식의 멋지게 허무한 이야기들이 많다.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고,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맹자를 비판하는 '시라미네'라든가, 당대 싹트기 시작한 현실적인 경제 관념을 대화체로 풀어간 '빈복론' 등도 있다. 그래도 후대의 독자가 이런 소설집에 기대하는 것은 아무래도 '잡초 속의 폐가'와 같은 '뜬구름의 정서'일 것이다. 근대 일본인의 경제관 같은 것은 연구자들만 관심 가지면 될 일 아닌가. 


<죽음과 섹스>(도리언 세이건, 타일로 볼크/동녘 사이언스)

제목이 좀 무시무시하지만, 냉정하고 위트있는 과학책이다. 두 명의 과학자가 각각 죽음, 섹스 부분을 나누어 썼다. 기록을 위해 줄친 문장 몇 가지를 옮기자면. 

"우리의 몸은 영구적인 것들의 일시적인 배열이다."  

"노화는 놀라울 정도로 삶과 잘 맞아떨어지게 조율되어 있고, 삶의 방식 및 번식 방법과 조화롭게 일치한다."

"우리 모두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나누거나, 과거의 사람들이 현재의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자양분을 공유한다. 우리 모두는 죽은 자들을 흡수하고 그것을 서로에게 전달한다."

"우주적 체계에서 생명의 진정한 목표는 섹스라기보다는 번식이다."

"생명이 태양 에너지를 변형하는 과정은 우리의 도덕성을 넘어서고, 우리 인류보다 오래 되었으며, 우리의 에로틱한 에너지와 성적 강박관념의 원천이다."

"종교적 도덕률에 자연의 기초가 전무하다는 것을 깨달은 일부 과학자들과 도덕가들은 올바른 행동에 대한 지침을 과학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연에서는 폭군들, 착취를 일삼는 경영자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 마음 속에 감추고 있는 끔찍한 짓을 하기에 도움이 되는 눈부신 선례들과 훌륭한 지침들이 쉽게 눈에 띈다."

"티베트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것은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다. 영적 감정에는 생물학적 기원이 있다. 친이종적 충동, 즉 일시적인 섹스를 통해서든 영구적인 공생이나 이종간 혼혈을 통해서든 우리가 아닌 것들과 결합하려는 충동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영적 위안을 준다. 


마지막에 인용한 "영적 감정에는 생물학적 기원이 있다"는 철저한 유물론자, 과학자의 '믿음'일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이 말을 너무 자주 하지는 않으려 한다. 생물학와 영적 감정은 서로를 인정하되, 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 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 좋은데, 중간에 유령하고 발바닥 그림 넣은건 누구 아이디어인가. 


<아메리칸 사이코>(브렛 이스턴 앨리스/황금가지)

세번째 챕터를 읽은 뒤 포기. 1980년대 여피들이 입은 옷, 사용하는 화장품, 비치된 가구, 먹는 음식, 자주 가는 식당 등을 광고하듯이 나열하고, 간혹 지지부진한 섹스를 한다. 몇 챕터 뒤를 읽으니 두 명의 창녀와 가학적인 성행위를 하고, 길을 가던 개를 죽인다. 아마 하권쯤에는 사람도 죽이는 것 같다. 알량한 직업과 그를 통해 얻는 몇 푼의 돈과 그를 통해 누리는 상품을 자랑하는 어떤 미국 사람들이 '사이코'라는 사실은 두 권짜리 책을 안 읽어도 충분히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