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이 좋다.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에 샤프로 줄을 긋다가 느꼈다. 샤프심은 종이와 마찰했다. 까끌까끌. 부드럽게 줄이 그어지지 않았다. 책이 마뜩치않게 내준 좁은 길 위로 샤프가 아슬아슬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책의 매끄러운 종이에는 상처가 나고, 샤프는 원치않는 경범죄를 저지른듯한 느낌.

연필로 줄을 그으면 부드럽다. 종이의 표면을 거침없이, 매끄럽게 흐른다. 연필을 깎은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가 더 좋다. 끝이 뭉툭해진 연필이 종이 위를 활강하듯 미끄러져 간다.

작은 연필깎기로 연필을 깎는다. 가늘고 곱게 갈린 연필 찌꺼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와 연필, 나와 나무, 나와 자연이 손을 마주치는 느낌이다.


(며칠 뒤 이어서 적음)
오늘은 옆 자리의 선배가 파베르 카스텔 샤프를 자랑했다. 샤프심이 아주 굵었고, 보통 심보다 비싸다고 했다. 내 제도 샤프의 날카롭게 긁히는 느낌과 달리 부드럽게 종이 위를 스쳤다. 아름다웠다. 그래도 난 연필깎기로 나무의 결을 베어낼 수 있는 연필이 좋다. 방금 전까지도 연필로 줄을 쳐가며 스티븐 킹의 <죽음의 무도>를 읽었다. 빨리 잘 읽힌 것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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