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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혁명에 헌신한 사나이, <자백의 대가>

자백의 대가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전혜영 옮김/글항아리/532쪽/2만2000원


“똑똑하고 교양 있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소한 것까지 꼼꼼하게 신경 쓰는 사람, 일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 모든 방면에 프로 정신을 보이며 상부를 만족시키는 성과를 보여주고자 애쓰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에 대체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이 진술은 깡 켁 이우, 일명 ‘두크’라 불린 어느 관료에 대한 자타의 평가다. 조직에 속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칭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크가 크메르 루즈의 교도소장이었고, 그 교도소에서 1만2000명이 고문당한 뒤 살해됐다면 이 평가는 달라져야 할까. 


<자백의 대가>는 2009년 3월부터 1년 4개월간 캄보디아 프놈펜의 국제 재판소에서 열린 두크의 재판 방청기다. 저자는 르완다, 시에라리온, 콜롬비아 등에서 벌어진 반인륜 범죄 재판을 보도하는 등 국제 재판을 전문적으로 취재해온 프랑스의 저널리스트다. 


제목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1975년~79년 S-21 교도소에서 일했던 두크는 능수능란한 취조자였다. 그는 수인을 어르거나 달래서 결국 원하는 자백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이 때문에 법정에 선 그는 자신의 행위를 일정 부분 자백하고 참회하면서도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언변을 보였다. 그는 남의 자백을 받는 대가이면서 교묘한 자백을 하는 대가다. 


두크는 1942년 11월 생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과 해방 이후의 혼돈기에 빠져있던 캄보디아에서 자란 그는 수학, 물리학, 화학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같은 스터디 그룹에 속했던 여학생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었지만, ‘동지애’를 넘어선 연애는 금기시됐다. 그때는 “우기 때 벼가 자라는 논처럼 풍성한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그런 세계”였다. 


20대가 된 두크는 프랑스 유학파 교사를 만나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독재 정권의 탄압에 학교가 흔들리자 두크는 ‘혁명’에 사로잡혔다. 교사 중 한 명이 “혁명 조직에 가담하는 것은 마치 원 궤도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마오쩌둥주의에 심취한 두크는 혁명의 길에 투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두크는 밤에는 혁명 조직에서, 낮에는 수학 교사로 일했다. 형편이 어려운 제자에게는 방과 후 공짜 과외도 해주는 훌륭한 교사였다. 수업 중 정치적인 언급을 한 적은 없지만, 월급의 7분의 6을 혁명 운동에 기부했다. 1967년 북서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우파 정권이 ‘빨갱이 사냥’에 나서자, 두크는 지인들에게 작별을 고한 뒤 지하조직에 들어갔다. 이듬해 경찰에 체포된 두크는 20년의 강제노동형을 받았다. 두크는 고문을 받진 않았지만, “혁명을 위해 싸우는 한 사람으로 혁명을 위해 고문을 감당을 준비가 되었다”고 훗날 법정에서 말했다. 


혁명의 대의는 숭고했다. 론 놀 장군의 친미 정권을 축출한 뒤 75년 4월 세워진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의 헌법 서문에는 이렇게 써있다. “민주 캄푸치아는 독립적이고 화합과 평화, 중립을 지향하는 국가가 될 것이다. 다른 국가를 추종하지 않고 우리의 국토 내에서 오롯이 주권을 행사하리라. 행복과 평등, 정의,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득한 속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없는 세상, 또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의 구별 없이 조화롭게 살며 국민의 단결력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회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숭고에 이르는 과정은 지난했다. 순백의 혁명가들은 혁명의 장도 위에 놓인 한 점의 티끌도 참아내지 못했다. “적을 제거하라. 마지막 한 명이 나올 때까지 거듭, 계속해서 적을 찾아 제거하라. 그래야 당의 권력이 완벽한 순수성을 띨 수 있고, 모든 부서에 속한 상하 지도자들이 청렴결백하게 존재할 수 있다.” 완전한 민주사회를 만드는 과정은 민주적이지 않았다. 


S-21은 혁명의 완성을 위한 기관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이 교도소는 5개 동으로 이루어졌다. 정치범들을 가두고 정보를 얻어낼 목적으로 세워진 이곳에 두크는 부책임자로 부임했다. 옛 정부의 지도자, 장교, 관료, 귀족을 가두었던 S-21은 곧 도시의 신흥 부자들, 혁명 정부에 도움이 안되는 정신질환자들, 나병환자들, 지식인들까지 수감하기 시작했다. 


혁명은 적의 피를 원했다. 그래서 적이 없으면 적을 만들었다. 웬만한 사람들이 옥에 갇히자 이번에는 당내의 ‘불순한 인물’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S-21의 책임자도 그 대상이었다. 어제의 간수가 오늘의 수인이 되는 일도 많았다. 직속 상관이 제거되자 두크가 그 자리에 올랐다. 성실하고 철두철미한 두크는 곧 혁명 정부가 원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두크는 “결코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인 일은 없다”고 했지만, 교도소 내 고문과 처형은 모두 그의 펜을 거쳐 이뤄졌다. 잡혀온 사람들은 대부분 CIA나 KGB의 첩자라는 누명을 썼고, 연루된 사람의 이름을 댈 때까지 고문을 받았다. CIA, KGB가 무슨 조직인지 모르는 사람도 자신이 그들을 위해 일한다고 말해야 했다. 그것이 두크와 크메르 루즈가 듣고싶어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고문당한 사람이 다른 이의 이름을 대고, 그렇게 붙잡혀온 이들이 또다른 이의 이름을 대자 ‘적’의 명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법정에 선 깡 켁 이우, 일명 두크.


고문 기술은 정교했다. 우선 ‘차가운 고문’과 ‘뜨거운 고문’이 있었다. ‘차가운’ 팀이 말로 죄수를 다그친 뒤, ‘뜨거운’ 팀이 육체에 고문을 가했다. 두크는 “일단 말로 답을 이끌어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지만, 두크의 ‘원칙’이 실현되는 일은 드물었다. 죄수가 죽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고문하는 기술이 전수됐다. 전기 고문, 채찍질, 비닐봉지 고문, 손톱 아래 핀 찔러 넣기, 발톱 뽑기, 물고문, 독충으로 겁주기, 배설물 먹이기 등이 동원됐다. 고문을 당한 뒤 자백한 사람은 얼마 후 처형됐다. 하나씩 불러내 목덜미를 내리쳐 즉석에서 죽이는 방식이 많이 사용됐다. 굶주린 채 수감되고 고문당한 수인들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정말 아무 것도 안 한 것이 맞을까. 혹시 고문을 당해도 쌀만큼 나쁜 짓을 한 건 아닐까. 


법정에서 두크는 교도소를 관리한 책임과 공산당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1만20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데 함께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러나 판사와 방청객의 판단 능력을 모호하게 흐리는 논리를 구사해 법정을 시험에 빠지게도 했다. 두크는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상관들에게 충성하고 복종했기 때문이며, 자신은 혁명에 대한 열정보다는 생존에 대한 필요 때문에 일했다는 논지를 폈다. 판사가 다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만 일을 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묻자 두크는 “필요인지 열정인지 확실하게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어디 있나”고 되물었다. 


캄보디아 정부와 함께 자신을 법정에 세운 유엔에 대해선 “정의란 늘 권력에 딸린 일”이라며 크메르 루즈와 유엔의 깃발 아래 행하는 정의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60대 노인으로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그는 객관적인 사실과 정확한 날짜를 언급했지만, 핵심적인 윤리적 질문에 대해서는 엉뚱하고 지루한 답을 해 질문자를 지치게 하는 방식을 썼다. 


베트남이 침략해 정권이 몰락하자 두크는 다시 크메르 루즈 지하운동가로 돌아갔다. 크메르 루즈가 장악한 지역에서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고 2년간 중국에 체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엔 기독교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로 거듭났다. 공산주의가 자백을 원했다면 기독교는 고해성사를 원했다. 두크는 “인간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공산당이 내 조국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하느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걸 압니다”라고 말했다. 두크와 함께 활동한 교육자, 성직자들은 두크가 과거에 그토록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1999년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아일랜드 출신 사진작가가 두크의 얼굴을 알아봤고, 두크는 체포돼 군사 형무소로 이송됐다. 


법정은 두크에 대한 단죄의 장이자 희생자와 유족들의 신원의 장이었다. 완전한 우연으로 살아남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증언했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기도 했기에, 범죄의 명확한 구성 요건을 증명해야 하는 법정에서는 소용이 없는 증언도 있었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감정만은 또렷해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증언해야 했다. 그렇게 말로 쏟아내야 다시 숨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리된 희생자 사진. 크메르 루즈 당시의 캄보디아인들은 모두 똑같은 머리모양을 만들어야 했다. 


두크는 최후 변론에 나섰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19세기 프랑스의 시를 읊었다. “탄식하고 울고 기도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운명이 너를 부르고자 한 길에서/너의 길고도 무거운 임무를 열정적으로 행하라/그 후에는 나처럼, 고통을 느끼면서 아무 말 없이 죽어라” 그때 91세가 된 프랑스의 마지막 레지스탕스 투사가 위성 통신을 통해 소송의 마지막 증인으로 나타났다. 엄격하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단호히 결정하지만 결정하기 전에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포괄하는 이 지혜로운 노인은 이 시를 다르게 해석했다. “시인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명예를 잃지 않는 인간이 되길, 살면서 가장 끔찍한 사건을 겪어도 소신을 굽지지 않길 바라는 열망만을 담았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이 시에 동감한다면 형 선고를 받을 경우 그 역시 이 시에 나오는 늑대처럼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용기를 발휘해 그것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피고인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 책임을 면제해달라고 마음대로 의사를 표명할 권리는 없습니다.” 노인의 이름은 <분노하라>로 다시 유명해진 스테판 에셀이다. 


결국 두크는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두크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012년 2월 2심제로 진행된 재판에선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아직 살아남은 크메르 루즈 지도자에 대해서도 재판이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