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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삼위일체,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이 영상을 본 뒤 걸프전의 야간 투시 기법 촬영을 떠올렸다는 덕후, 미스터 피터 노왁.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피터 노왁 지음·이은진 옮김 | 문학동네 | 432쪽 | 1만7000원

현대의 과학 기술은 인류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인터넷으로 지구 반대편의 상대와 실시간 채팅을 한다. 속이 든든해지는 햄버거 세트를 3000원에 사먹을 수 있다. 거실의 로봇 청소기는 스스로 먼지를 찾아 없앤다. 인류는 더 이상 배곯지 않고 편리한 삶을 누리며 온갖 즐길거리에 둘러싸여 있다. 다 과학 기술 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학 기술의 발전을 추동했을까. 삶의 질을 높이기로 다짐한 기술자의 헌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과학자의 노력? 굶주리는 이웃에 대한 농부의 연민? 

과학 기술에 대한 글을 쓰는 캐나다의 저널리스트 피터 노왁은 전쟁, 색욕 그리고 식욕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노왁은 이 세 가지를 ’부끄러운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노왁은 2004년 인터넷 공간을 떠들썩하게 한 미국 재벌집 딸 패리스 힐튼의 섹스 비디오를 보며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힐튼의 ‘기술’에 넋을 놓은 사이, 노왁은 초록빛 화면에 주목했다. 힐튼의 피부가 슈렉 같은 초록빛이었던 이유는 이 비디오가 조명 하나 없는 캄캄한 방에서 야간 투시 기법으로 촬영됐기 때문이다. 야간 투시 기법 촬영은 1990년 걸프전 당시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이 전개한 이른바 ‘사막의 폭풍’ 작전을 통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미군 스텔스기는 야간 공습을 감행했고, 이라크군은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무의미한 포탄을 쏘아댔다. CNN은 이 광경을 초록빛 화면으로 중계했다.

기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사용하는 비닐봉지, 헤어스프레이, 비타민, 구글 어스 등은 모두 군사비로 개발됐다. 군은 ‘거대한 기술 창조자’이자 ‘장기적인 얼리 어답터’다. 군과 군이 운영하는 연구기관은 민간 기업이 맡기엔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연구를 앞서 수행했다. 그 목적은 물론 적국을 기술적으로 압도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함이었다. 군이 완성한 기술은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흘러나왔다. 민간 기업은 이 기술을 응용한 상품을 만들었다.

영국의 도시 코번트리는 2차대전 중 독일 공군의 공습을 받아 철저히 파괴됐다. 영국군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극초단파를 발생시키는 구리관인 공동자전관의 기능을 개선하는 실험을 했다. 공동자전관에서 만들어진 전파는 사물에 부딪치면 메아리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레이더의 기초 원리다. 미군과 영국군은 힘을 합해 레이더를 만들었다. 이후 레이더는 독일 공군의 공습을 막았고 일본 전함의 접근을 알렸다. 레이더는 전쟁을 끝내는 데 원자폭탄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났다. 레이더는 소용이 없었고 레이더를 만들던 기술자들은 일손을 놓을 상황이 됐다. 자전관을 만드는 군산복합체의 한 연구원이 겪은 우연은 이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줬다. 실험을 하다가 절로 녹아내린 주머니 속의 초콜릿을 본 연구원은 전자파가 전장뿐 아니라 주방에서도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원들은 음식에 들어 있는 물 분자에 열을 가하되 수분이 없는 세라믹이나 플라스틱 용기는 뜨거워지지 않는 오븐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 기계를 ‘레이더 레인지’라 불렀고, 오늘날의 주부들은 전자레인지라고 부른다.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 음식 할 시간이 줄어든 현대인들은 앞다퉈 전자레인지를 들여놨다. 음식이 달라붙지 않는 프라이팬, 공기는 통하되 수분 침투는 막는 고어텍스 의류, 밀폐 뚜껑이 달린 보관용기는 모두 군이 개발한 화학물질을 응용한 제품이다.

이제는 원치 않는 광고의 대명사가 된 스팸은 2차대전 당시 미군의 보급품이었다. 나폴레옹은 “군인은 위장으로 전진한다”고 말했다. 배고픈 군인은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신선한 고기를 대량으로 전장에 보급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병참 장교 출신 정육업자 제이 호멜은 잘 팔리지 않는 돼지고기 어깨 살에 물과 소금 등의 첨가물을 넣은 뒤 상하지 않도록 통조림에 밀봉했다. 스파이스드 햄(양념된 햄)을 줄여 스팸이라 불리게 된 이 통조림은 휴대가 쉽고 싸고 상하지 않았다. 미군은 하루 세 끼 스팸을 먹었다. 지방과 나트륨이 많아 건강에 좋진 않았지만, 스팸은 종전 후에도 큰 인기를 끌었다. 

 위의 스팸이 아니라 아래의 스팸입니다. 

패스트푸드의 대명사 맥도널드도 군에서 흘러나온 기술을 써먹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온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했지만, 전후 경기가 좋아진 뒤에는 모두 빠르고 싸고 능률적인 외식을 찾기 시작했다. 맥도널드는 햄버거 하나를 만드는 데 단 몇 초라도 줄이려고 노력했다. 맥도널드 최고 경영자는 2차대전 당시 군수품을 만든 기술자 짐 쉰들러를 고용하는 혜안을 보였다. 쉰들러는 비좁지만 튼튼하며 청소하기 쉽고 모든 곳에 표준적인 도면을 적용할 수 있는 잠수함 주방을 설계한 경력이 있었다. 쉰들러는 순식간에 수백 개로 늘어난 맥도널드 지점의 주방을 설계했다.

평화로웠다. 배도 불렀다. 남은 건 색욕이었다. 현대의 포르노그래피 산업은 2차대전의 부산물이었다. 영화는 전시에 적과 그들의 약점을 녹화하고 군인을 훈련하고 고국의 시청자에게 사기를 진작하기에 유용한 도구였다. 그러나 당시 할리우드 장편극영화를 찍는 데 사용되던 35㎜ 카메라는 전시에 적합하지 않았다. 너무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결국 화질이 떨어지고 필름도 덜 들어가지만 휴대가 좋은 16㎜ 카메라가 전장에 동원됐다. 미 육군은 영화를 촬영하고 편집할 신병을 훈련하기 위해 영화제작훈련소까지 만들었다. 전쟁 이후 전역한 이들은 이전보다 더욱 저렴하고 가벼워진 카메라를 들고 온갖 실험을 시작했다. 조지 패튼 장군이 이끄는 제3군단 소속 사진 부대에서 복무했던 러스 메이어가 대표적이다. 영화팬들은 메이어를 <부도덕한 티즈씨>의 감독으로 기억한다. 이 영화는 여성의 알몸을 투사하는 능력을 가진 방문 판매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인영화였다. 2만4000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부도덕한 티즈씨>는 100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인터넷은 원래 핵 공격을 받아 몇몇 접속점이 망가지더라도 남아 있는 다른 접속점을 통해 통신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든 군용 통신망으로 개발됐다. 초기 인터넷의 개발자 누구도 그것이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고는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터넷 같은 신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적극적인 분야는 포르노그래피 산업이었다. 고객들이 은밀하고 신속하게 성(性)에 접근할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노 산업 종사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미국 최초로 웹사이트를 만든 잡지는 플레이보이였고, 사진에 디지털 워터마크를 삽입하는 기술을 최초로 만든 곳도 플레이보이였다. 포르노 사이트는 해커들의 주요 목표물이 되기 때문에 뚫을 수 없는 보안 장치를 연구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 고글, 목표물 탐지기 등을 납품하던 폴라로이드사는 1948년 사진을 찍어서 바로 현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었다. 필름을 현상할 때 낯모르는 기술자가 지키는 사진관을 거쳐야 했던 프로와 아마추어 누드 사진가들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애용했다.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대변인 수전 스트러블은 “당신이 개발한 기술이 쓸 만하고 튼튼한지 알려면 그 기술이 포르노 업계에서도 잘 통하는지 보면 된다”고 말했다.

갓 실현됐거나 앞으로 실현될 첨단 기술 제품들도 대체로 싸우고 먹고 성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폭탄 조각을 제거하는 로봇은 로봇 청소기로 상용화됐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이 죽어나가자 미군은 무인 시스템을 도입해 전쟁을 치르는 계획을 세웠고 무인 자동차, 로봇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성항법장치(GPS)는 1960년 미국 해군이 실험한 위성에서 처음 나온 기술이다. 실제 인간을 대신하는 섹스 돌,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유전자변형농산물이 첨단 기술의 산물임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의 결론은 ‘악덕이 미덕을 낳았다’로 요약해도 좋겠다. 전쟁, 섹스, 음식 등 인류의 가장 오래됐으면서 수지맞는 사업이 기술 발전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왁의 말대로 “욕망의 삼위일체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술들이 인류의 삶을 과거보다 윤택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 않다. ‘위생 처리’돼 피와 살점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게임처럼 변했고, 전쟁 게임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에서 본 듯한 조종 장치로 군용 로봇을 작동한다. <터미네이터>에서 튀어나온 듯한 로봇 군인이 제3세계의 인간 군인을 찾아내 죽이는 것도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런 풍경을 많은 이들은 디스토피아라고 부른다. 노왁은 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했지만, ‘중립’을 자처한 과학자들이 핵폭탄이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 투입된 살충제 치클론B를 만들었다. 기술 발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렇게 발전된 기술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건 인류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