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은 정규 미술 교육은커녕 정규 교육 자체에 거의 무심했다. 하지만 저명한 미술평론가 데이비드 실베스터와 25년에 걸쳐 행한 9편의 인터뷰는 예술가의 직관과 지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게 한다. 화가는 그림, 영화감독은 영상, 무용가는 몸짓으로 표현하므로, 그들에게 문자 혹은 구술 언어는 주된 표현수단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빼어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언어로 번역해 대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듯하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흔히 이해되는 방식이 아니거나, 말하거나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는 태도를 가질 뿐.)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디자인하우스) 중 흥미로운 대목을 발췌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성깔 있는 아이리쉬.
나는 오독에 화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마련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대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조차도 내가 한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흥분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좋아해 주면 나는 언제나 놀랍니다.
나는 내 삶이 가능한 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저 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파에 투표합니다. 그들이 좌파보다는 덜 이상적이어서 좌파의 이상주의로부터 방해를 받게 되는 경우보다 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다른 특징들을 제외한다면 결국 사람의 신체는 어떻게 보면 하나의 여과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작의 많은 부분이 작가의 자기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며, 작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 보이는 것은 그의 비판 감각이 보다 예리하기 때문이라고 종종 생각합니다. 이는 그가 어쨌든 보다 많은 재능을 지녔다는 뜻이 아니라 더 나은 비판 감각을 갖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내가 항상 은밀하게 바라는 바는 다른 모든 것들을 절멸시킬 그림을 그리는 것,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한 작품에 쏟아붓는 것입니다.
나는 도살장과 고깃덩어리를 그린 그림에 늘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게는 그것이 십자가 책형이 가진 의미의 전부입니다.
(데이비드 실베스터: 당신은 우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긴 해도 실제로는 특정한 명확성을 잃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우연에 맡기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맞습니까?) 나는 잘 정돈된 이미지를 원하지만 그것이 우연히 발생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사실의 불가사의는 비이성적인 흔적으로 이우러진 이미지를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비이성적인 흔적은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연이 항상 작업 과정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초상화 작업에서 하려는 것처럼 그 폭력성을 그림에 펼치는 것은 그것이 물감을 통해 폭력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장막을 두룬 채 살아갑니다. 가려진 존재인 셈이죠. 때때로 사람들이 내 작품이 폭력적으로 보인다고 말할 때 내가 가끔은 그 장막 한두 겹을 제거할 수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루시안 프로이트에 대한 3가지 습작(1969). 142만4000 달러에 팔려,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
모든 예술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본능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죠.
나는 자리에 앉아서 당신의 사실적인 초상화를 아주 손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항상 방해하는 것은 정확한 사실성입니다. 나는 그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의 보살핌을 받는다면 삶이 지루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사람들은 복지를 기대하고 그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삶에 대해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질 때 창조적인 본능이 축소된다고 생각합니다. (...) 복지는 삶에 대한 절망, 존재에 대한 절망의 반대입니다. 결국 존재란 어떻게 보면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돌봄을 받으며 잊히기보다는 존재의 위대함을 시도하고 만들어 나가는 편이 낫습니다. (...) 나는 그것이 삶의 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이 상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예술이란 사람들의 고통과 사람들 사이의 차이의 산물이지 평등주의의 산물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 행복한 사회를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신경 쓸까요?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한 사회가 남긴 유산입니다.
나는 늘 스스로를 화가가 아니라 우연과 운을 위한 매개자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에서 실재는 대단히 인위적인 것이며 재창조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히 대상에 대한 삽화에 지나지 않을 테고, 대단히 간접적인 것이 될 겁니다.
초상화의 모델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고, 포착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발산되는 그 무엇입니다. 나는 영혼과 같은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결코 영혼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은 그가 누구든 항상 무언가를 발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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