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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 도주의 기술, 예술의 의미,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한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기소된 적이 있다. 당시 검찰은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야간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이 G20 행사에 쥐와 같이 불길한 존재를 그려넣다가 경찰에 발각됐다”며 “이것은 통상적인 예술행위가 아니라 조직적 범죄행위에 해당된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한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는 뱅크시로부터 창의성, 테크닉과 함께 도주의 기술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문제적 남자, 뱅크시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 본명, 이름, 나이 등 어느 것도 밝혀지지 않은 작가다.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등에 자신의 패러디 작품을 몰래 전시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장벽에 평화에 대한 소망을 담은 그래피티를 그렸다. 제도권 미술계, 국가의 권위를 조롱하지만, 그럴수록 컬렉터들은 열광했다. 안젤리나 졸리,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그의 작품을 고가에 구입했다. 뱅크시는 쥐를 즐겨 그리곤 했는데, 지난해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넣어 기소된 박정수씨는 뱅크시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는 뱅크시가 연출을 맡은 다큐멘터리다. 발단은 엉뚱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구제 옷 장사를 하는 티에리 구에타라는 인물이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를 들고 무엇이든 촬영해온 구에타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라는 예명을 쓰는 사촌이 거리 미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구에타는 그를 따라다니면서 거리 미술의 세계에 진입했다. 불법인데다가 일회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지기 힘든 거리 미술 작품과 작업 과정이 구에타의 테이프에 담겼다.


문제는 구에타가 영화감독이 아닌 ‘기록광’이었다는 사실. 구에타의 창고에는 희귀한 자료들이 쌓여갔지만, 정작 그는 그 테이프들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기록할 뿐 정리하지 않은 것이다. 뱅크시는 거리 미술에 대한 소중한 기록들이 사장되는게 아까워 구에타에게 자료를 영화로 만들어보길 권했고, 구에타는 6개월동안 테이프와 씨름한 끝에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본 뱅크시는 말했다. “그는 영화감독이 아니었다. 정신병자인데 카메라가 있었을 뿐이다.”


호구인가 위너인가. 티에리 구에타

결국 뱅크시는 직접 영화를 만들기로 했고, 그 결과물이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종반부 구에타가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데뷔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과대망상에 빠진 아티스트, 언론, 컬렉터, 대중이 ‘폐품’을 ‘작품’으로 둔갑시키는 모습이 담겼다.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는 전시관람후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로 나갈 수 있는 미술관의 구조를 뜻한 말로서, 상업주의와 결탁한 현대 미술계의 세태를 비꼰다. 애초 뱅크시는 영화 제목을 <쓰레기 같은 작품을 바보에게 팔아넘기는 방법>이라고 붙이려 했다고 한다. 18일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씨네코드 선재, 아트하우스 모모 등에서 개봉한다.


뱅크시의 쥐그림. 한국에서도 본 적 있다. 한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뱅크시에게 배워야할 것은 창의성이 아니라 도주의 기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