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네트워크>가 <스티브 잡스>보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뜬 2011년 10월5일부터 할리우드 사람들은 그를 스크린으로 소환할 방법을 궁리했을지 모른다. 잡스는 전 세계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생각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괴팍한 캐릭터와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으로도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가 에런 소킨이 <스티브 잡스>의 시나리오를 쓴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기대감이 올랐다. 소킨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로 IT 천재의 내면에 도사린 빛과 어둠을 능란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소킨이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스티브 잡스>를 저본으로 삼아 일찌감치 시나리오를 써나간 반면, 연출자를 정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소셜 네트워크>를 연출했던 데이비드 핀처가 하차하고, <28일 후>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대니 보일이 합류했다. 배우도 애초 물망에 올랐던 크리스천 베일에서 마이클 패스벤더로 바뀌었다.
제작진은 잡스의 일대기를 순차적으로 구성하지 않았다. 대신 잡스가 나선 프레젠테이션 중 세 번을 골라 시작 전 40분간의 무대 뒤편 이야기를 보여준다. 마치 3막으로 구성된 연극 같은 분위기다. 세 번의 프레젠테이션을 담아낸 형식도 각기 다르다. 1984년 매킨토시 론칭 프레젠테이션 장면은 과거 학생 영화에서 자주 사용됐던 16㎜ 카메라로 촬영해 입자가 거칠다. 음악은 1980년대풍의 신시사이저 연주다. 매킨토시의 실적 악화로 자신이 세운 애플사에서 쫓겨난 뒤 만든 1988년 넥스트 큐브 론칭 행사가 2막에 해당한다. 이 대목은 몇 년 전까지 대부분의 상업영화가 사용했던 35㎜ 카메라로 찍었다. 음악은 교향악단이 연주했다. 1998년 아이맥 론칭 행사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 음악은 애플사의 디자인처럼 최소화한 배경음악이다. 그리고 잡스는 현재 대부분의 관객이 기억하는 청바지에 검은 터틀넥, 뉴발란스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다.
엔지니어도, 프로그래머도 아닌, 지휘자로서의 스티브 잡스.
솔직히 잡스 역의 마이클 패스벤더보다 워즈니악 역의 세스 로겐의 연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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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는 턱없는 판매량을 기대하는 몽상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독재자였다. 얼핏 보기엔 황당한 아이디어를 너무나 강한 확신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바로 탁월한 선동가였다. 대중은 매번 프레젠테이션에 앞서 박수와 발구르기로 잡스를 기다렸다. 무대 뒤의 잡스는 완벽한 공연을 위해 사람, 그리고 기계에까지 자기처럼 완벽해질 것을 요구하는 록스타를 연상시킨다.
무대 위의 스타가 반드시 무대 아래의 인격자는 아니다. 무대 뒤편으로 잡스의 딸을 홀로 키우고 있는 옛 여자친구가 찾아온다. 귀여운 금발 소녀가 “아빠!”라고 부르자, 잡스는 “난 네 아빠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법원에선 잡스가 친부임을 인정했는데도 그렇다. 애플사의 성공으로 4억달러 재산을 소유한 잡스는 옛 여자친구에게 법원이 판결한 대로 월 385달러의 생활비만 보낸다. 일을 일이 아니라 자신을 쫓아낸 자들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서도 ‘기업가’ 잡스보다는 ‘인간’ 잡스를 볼 수 있다. 잡스는 성인이 돼 자신을 증오하는 딸에게 말한다.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어(I’m poorly made).”
영화가 그리는 잡스는 전기나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잡스의 모습 그대로다. 별다른 해석을 가하거나 추가적인 사실을 들춰내기보다는, 잡스라는 독특한 인물을 일급 배우들의 몸으로 육화해 제시하는 데 집중했다. 3막의 구성 방식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 방식에서 탈피했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줄 만하지만, 한 인간의 삶을 한정된 시간과 장소로 압축시킬 때 일어날 법한 무리수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잡스의 여자친구, 딸,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정확히 필요한 시간, 필요한 장소에 3회씩 등장한다. 마치 잡스를 시험에 빠트리기 위해 나타나는 유령같이 보인다. <스티브 잡스>는 다음달 열리는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케이트 윈즐릿) 등 2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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