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말을 시작했다.
얼마전까진 내가 말을 하면 아이는 그 말에 해당하는 그림 혹은 사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식이었다. 동물이 있는 그림책을 보면서 "사자 어딨지?" 하고 물으면 아이는 사자를 손가락으로 찍었다. 그런데 약 열흘 전부터 아이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사자"라고 발음한다. 연령을 고려하면 빠른 편은 아니다. 여자 아이, 그리고 형제 자매가 있는 아이가 말을 빨리 배운다고 한다.
게다가 정확한 발음도 아니다. 아이가 지시하는 대상이 '사자'라는 것을 알고 들어야만 식별할 수 있는 발음이다. 그러나 열흘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대단한 속도다. 그 많은 단어들을 다 알면서도 발음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내놓는가 싶을 정도다. 사자, 기린, 코끼리, 거북이, 토끼 등 그림책에서 자주 보던 동물들은 물론이고, 달팽이, 애벌레, 뱀 같은 것도 발음한다. 심지어 그 동물들의 소리나 움직임을 묘사하는 말도 같이 이야기한다. '나비'하면 '나풀나풀'이라고 말하고, '동물농장' 노래를 들려주면 '닭'이 나오는 대목에 '꼬끼오'라고 말한다.
주로 명사다. 그런데 그 범주가 꽤 넓다. 동물 이름 뿐 아니라 침대, 의자 등 가구의 이름, 택시, 소방차, 버스 등 탈 것의 이름, 뽀로로, 에디, 패티, 크롱 등 <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도 말한다. 심지어 마트, 택배까지 말한다. (마트나 택배를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에 대해선 나와 아내의 자아성찰이 요구된다)
아무래도 아이는 자기가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자주 발음하게 마련인데, 요즘은 '대또퐁'과 '디도콘'이다. '핸드폰'과 '리모콘'은 가능하면 쥐어주지 말아야 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의 끊임없는 요구를 지치지 않고 소화할 자신이 없거나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싶으면 아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직 명확히 발음하는 동사는 '주세요'밖에 없다. 뭘 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뜻을 알고 발음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이는 '주세요'라고 말한다. 아직 형용사는 들은 적이 없다.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까>(로버타 미치닉 골린고프. 캐시 허시-파섹/교양인)이란 책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읽게 됐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다. 아이는 세상 모든 언어를 발음할 가능성을 타고 태어난다.(당연하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어린 시절에 미국에 입양되면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한다) 그리고 모국어를 익혀가는 과정에서 그 가능성을 제거해가고, 결국 모국어를 발음할 수 있는 능력만 남긴다. 결국 내 아이가 한국어를 말한다는 건 한국어 이외 그 모든 언어를 모국어로 발음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과정이 완료됐다는 뜻이다. 내 아이는 열흘 전부터 '사자'를 발음함으로써,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게 됐다. 그리고 이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네 팔자다.
하나 더 언급할 것은 부모와 아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물론 우리 부부와 아이는 이전부터 음성 언어 이외의 방법으로 아이와 의사를 교환해왔다. 손짓, 몸짓, 표정(주로 울음과 웃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보다 좀 더 추상적인 수단인 언어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아이는 핸드폰이 숨겨져있는 화장대 앞까지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고도, 쇼파에 앉아서 '대또퐁'이라고 발음함으로써 내 스마트폰의 '토킹 벤'이나 '토킹 피에르'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아이가 말을 시작했다. 부모와 아이 사이 관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저 입으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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