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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리뷰.

근래 지면에 쓰기 위해 읽은 어느 책 중에서도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단연 추천도서다. 저자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그 문체와 전개가 흥미로워서 끝까지 읽힌다. 수치에 의지한 분석에서 출발해 윤리학에 기반한 믿음(혹은 의지)으로 나아가며 좌파의 각성을 촉구하는 이 책은 어느 좌파에겐 매우 불편하고 심지어 '꼰대'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꼰대 좌파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토니 주트는 지난해 루게릭병을 앓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의 유작이다.





“복지예산은 역대 최고”라고 자화자찬하는 집권자들이나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어차피 이 책에 관심이 없을 것 같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좌파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저자 토니 주트는 좌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가를 두려워하지 마라”,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공공의 목적을 생각하라”.

현대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폭압적인 국가에 시달려온 한국의 좌파들은 국가 권력을 강조하는 시각에 두드러기가 날지도 모른다. 일단 주트는 이 책이 “대서양 양안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해도 미국과 서유럽의 생활양식이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책의 목표는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또한 국가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국가가 어떤 종류의 국가인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2008년의 전 지구적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은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지난 30년간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일관되게 공적 영역을 축소하고 사적 영역을 확대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1968년 GM의 CEO가 벌어들인 소득은 기본급과 수당을 합쳐 일반 노동자의 66배였다. 오늘날 월마트 CEO는 일반 노동자 임금의 900배를 번다. 소득 불평등의 정도는 유아사망률, 범죄발생 빈도, 기대수명, 정신질환 발병률과도 관련 있다. 불평등의 심화는 인간을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일찍이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 이렇게 썼다.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은 없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조건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는 말이다.”

원래 세계는 이 모양이 아니었다. 1914년 이전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결과는 두번에 걸친 대재앙, 즉 세계대전이었다. 복지국가는 다시는 그러한 재앙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의 산물이었다. 시장을 규제하고 공동체의 관계를 복원했다. 그리고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평화는 권태를 불렀다. 1960년대 신좌파를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복지국가는 지루한 일상이었다. 60년대 세대를 뭉치게 한 것은 공공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였다. 다시 발흥한 우파도 비슷한 심정이었고, 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주트는 믿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도덕적 본능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필요”로 한다고. 그러므로 부익부빈익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좌파는 인간의 도덕 본능을 충족시킬 언어를 개발해야 하고, 이는 국가의 역할을 새로 생각하고 정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주트는 방대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다.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2008년, 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에 갇혔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지난해 8월 타계한 주트의 마지막 책이 됐다. 김일년 옮김.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