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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듣는 삶의 단면,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1938~1988)


예전에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몇 권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고 있는 걸 본 한 친구가 표지의 제목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이거 그런 책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명을 한 적도 있다. 사실 그 책은 책 디자인이 좀 그래서 레이먼드 카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해할만도 하다. 


아무튼 그때 카버를 읽었을 대는 "좋았다" 정도였다.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일환으로 다시 나온 <대성당>을 읽은 뒤에는 그냥 입이 벌어졌다. 카버를 처음 읽은 뒤로도 10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도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고, 그래서 카버가 그린 삶의 정수를 조금 더 실감나게 느끼고 있는 걸까. 


카버를 두고 '미국의 체홉'이라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난 체홉의 단편 몇 편을 읽으며 그다지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 감수성은 체홉과 나 사이 있는 시간, 공간을 뛰어넘을 만큼 보폭이 넓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카버가 그린 1970~8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은 동시대 한국인의 삶을 그린 어느 단편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었다. 


카버는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살면서 겪을법한 특정한 시간, 공간을 잘라내 불쑥 독자에게 들이미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대성당>에 실린 12편의 단편 중에는 특별한 지위에 있거나 많은 부를 갖거나 남들이 못해본 이상한 경험을 해본 이는 없다. 아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나오는 부모 정도가 심각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었다) 나머지 인물들은 직장 동료로부터 내키지 않는 저녁 초대를 받았거나, 기차를 타고 그동안 소원했던 아들을 만나러 가거나, 술집에서 참전 군인의 시비를 당했다가 빠져나오거나, 아내가 집을 나간 후 아이 봐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거나, 시각장애인의 방문을 받거나 하는 정도다. 소설을 쓰기엔 심심한 소재다. 대단한 경험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도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버가 제시한 삶의 단면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얼마나 잘드는 칼을 썼는지 뼈와 힘줄과 혈관이 다 들여다 보인다. 마치 방금전까지 살아 있었고 지금이라도 이어 붙이면 살아날 것 같은 고기 덩어리같다. 


우리는 하루 하루의 삶을 쌓아간다. 어제는 오늘과 같고, 오늘은 내일과 같다. 이번 주, 다음 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늘 똑같아 보이던 삶이 어느 순간 완전히 변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이 꿈 많은 시절 그리던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면 정말 기쁠테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가끔은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진창에서 정신을 차릴 때도 있고, 진창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절히 노력했으나 깨어보니 다시 진창일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최악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되뇌며 살아간다.  


매일 똑같았던 삶은 언제 그렇게 변해 버린 걸까.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카버는 바로 그 순간을 잡아낸다. 예를 들어 '깃털들'에서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아기를 본 순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갓 아이를 잃은 부부가 중년의 빵집 주인이 내놓은 롤빵을 먹는 순간, '대성당'에서 맹인에게 대성당의 생김새를 알려주기 위해 그의 손을 잡고 그림을 그려준 순간 같은 것들이다. 사람의 삶은 이 순간을 넘어서면 이전과 달라진다. 


내 삶의 '결정적 순간'은 언제였을까. 내가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된 그날은 언제였을까. 입학, 입대, 입사, 결혼, 출산 같은 물리적 변화 말고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 건 언제였을까. 카버의 단편은 삶의 장면들을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