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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F와 역사소설, '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열린책들)을 읽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로 이어지는 '옥스퍼드 시간 여행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2054년이 배경이다. 하지만 책이 1992년 나왔다는 사실 때문에 2020년의 독자에게는 작은 당혹감이 생긴다.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만 빼놓으면 많은 부분의 과학기술이 2020년에 뒤떨어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유선 전화로 한다! 화상을 볼 수 있는 데, 별로 유용한 것 같지는 않다. 비상사태가 벌어져 서로가 서로에게 급박하게 연락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전화를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그것도 회선이 적은지 잘 터지지 않는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살다보니 좀 이상한 설정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뉴트로인가. 

 

14세기 영국 시골마을로 가 중세 생활상을 관찰하려는 역사학도 키브린과 21세기에 남은 그의 지도교수 던워디가 중심이다. 던워디의 온갖 걱정을 뒤로 하고 키브린은 과거로 향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정체모를 병을 앓고 쓰러진다. 같은 시각 영국에서도 질병이 퍼져 학교 주변 도시가 격리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키브린은 중세 사람들의 간호 끝에 정신을 차리지만, 이후엔 중세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병에 걸린다. 두 시대에 퍼진 병의 원인을 밝히려는 추리와 이에 대응하는 키브린, 던워디의 노력이 800쪽 넘는 이야기를 추동한다.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갈등구도, SF적 설정 등을 소개하는 초반부를 지나 키브린과 던워디가 상황을 파악하고 적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반부로 간다. 솔직히 중반부에선 읽는 속도가 잘 붙지 않는다. 코니 윌리스 소설 속 사람들이 그렇다고는 하는데, 좀 수다스럽고 쓸데 없는 일들을 많이 한다. 장르 영화에는 관객 모두가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그런 일을 해서 복장을 터지게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그렇다. 주인공 중 한 명인 키브린이 대표적이다. 굳은 고집과 의지로 중세에 가겠다고 한 건 키브린인데, 어찌된 일인지 막상 중세에 도착해서는 소풍 갔다가 길을 잃은 유치원생처럼 응석을 부리고 짜증을 낸다. 병을 앓아 몸과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한 행동이라고 소명이 되긴 하지만, 주인공이 줄곧 이렇게 행동하니 좀 답답하다. 

 

중세에 퍼진 질병이 페스트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종반부에서 속도가 붙었다.  키브린은 페스트가 퍼지기 전으로 가기로 돼 있었지만, 조작 실수로 인해 페스트가 한창 번지던 시기에 도착한 것이다. 키브린은 항체가 형성돼 페스트에 걸리지 않지만, 중세 사람들은 속수무책이다. 작가가 중반부까지 공들여 빚어냈던 등장인물들이 속수무책 죽어나간다. 혐오스러운 인간도 죽지만, 무고한 소녀도 죽는다. 고집스러운 시어머니가 죽고, 하인에게 연정을 품었던 며느리도 죽는다. 무엇보다 라틴어 기도문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마을의 유력자들로부터 냉대받지만, 사실 누구보다 신실하고 종교적인 로슈 신부까지 병마에 쓰러진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페스트가 중세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머릿속에 잘 구축됐던 마을이 병에 완패하는 모습은 생생하고 박진감있다. 페스트를 다룬 논픽션에서는 느끼기 힘든 생생함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굳이 시간여행SF가 아니라 중세 역사소설이어도 상관 없지 않은가. 

 

인터넷 서점에 가니 열린책들 판은 없고, 아작에서 새로 나온 판본만 있음. 그래서 내가 읽은 책을 직접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