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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왕좌의 게임' 작가의 호러SF, '나이트플라이어'



***스포일러 있음

조지 R R 마틴의 '나이트플라이어'(은행나무)를 읽다. 이제 마틴은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로 더 유명하다. '나이트플라이어'는 '왕좌의 게임'을 쓰기도 전인 1985년 선보인 작품이다. '왕좌의 게임'은 서양 중세를 연상시키는 판타지물인데, '나이트 플라이어'는 미래의 우주선 내부를 배경으로 하는 호러SF다. 물론 두 작품 다 잔혹하다. 사실 '나이트플라이어'가 더 잔혹하다. 머리통이 갑자기 터지고, 레이저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가르고, 처리되지 않은 뼈조각, 살점, 눈알 등이 무중력 상태의 우주선 안에 둥둥 떠다닌다.

몇 만 년동안 이동하고 있는 신비의 외계 종족 볼크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주선 나이트플라이어에 오른 여러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초능력자가 주인공이다. 나이트플라이어에는 선장 로이드가 이미 탑승중인데, 그는 왠일인지 우주선 반쪽을 홀로 사용하면서 홀로그램으로만 탑승객들 앞에 나타날 뿐 실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로이드가 정체를 숨기며 대는 이런저런 핑계는 영 미심쩍다.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가 자꾸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불길한 예감을 말하다가 결국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남은 과학자들은 하나 둘씩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또 각자 잔혹한 방법으로 죽어간다. 그 와중에도 외계 종족 볼크린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로이드의 정체는 여전히 미심쩍다. 

괴물 또는 살인마가 나타났을 때 문을 열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가 버리면 공포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도망칠 곳 없는 폐쇄 공간인 우주선은 그래서 공포물에 괜찮은 공간이다. '에이리언' 시리즈나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영화들은 밀폐된 우주선 내부의 공포를 잘 살렸다. '나이트플라이어' 역시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호러SF의 전형적 코드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로이드와 나이트플라이어호의 정체에 대해선 약간의 반전이 있다. 너무 놀란 정도는 아니지만, 기대치 못한 정도이기는 하다. 생전의 정신이나 마음을 데이터화해 기계 내부에 보존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아이디어가 '나이트플라이어'에 고유한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전 미치오 카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은 덕에 이것이 물리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니 좀 더 흥미로웠다. 물론 당장 쉽게 실현할만한 기술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로는 충분히 가능하고, 언젠가 누구나 쉽게 그 기술을 이용할만큼 보편화될 수도 있다. 과거엔 기술적으로 까다로워 매우 소수의 훈련받은 이들만 다룰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쉽게 다루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야가 꽤 많다. 영화 촬영이나 편집이 그렇고, 사제 폭탄, 유전자 분석 같은 것도 그렇다. 인류의 통념과 윤리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소수의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믿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한 두 사람이 세상을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이 현대 세계다.  

나이트플라이어의 비밀이 밝혀지는 대목은 그럴듯하지만, 볼크린과의 만남은 조금 얼버무린 것 같다. 아마 이 책이 근간하는 '천 개의 세계'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으면 좀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이라고 해서 모호하게 서술해도 되는 건 아니다. 

마침 '나이트플라이어'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도입부 10분을 본 뒤,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세상에는 영상물이 너무 많고, 볼만한 영상은 너무 적다. 초반에 확실한 각인을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볼 의지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