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스노케의 소설은 범우사에서 나온 문고판만을 읽었는데,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로 나온 <지옥변>을 구해두었다가 이번에 읽었다. 이번에 나온 <지옥변>은 10여년에 걸친 아쿠타가와의 활동 기간을 훑으며, 그의 작품 성향을 알 수 있는 대표작들을 묶었다.
어디서 가져온(사온?) 이미지인줄 모르겠으나 표지가 기막히게 마음에 들어서 기대감을 잔뜩 가지고 읽었다. 특히 '쇠퇴해가는 세계'라는 주제로 묶어 놓은 1부의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합쳐서 하나의 영화로 만든 <라쇼몬>과 <덤불속>이야 익히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라쇼몬>의 섬세한 테크닉과 <덤불속>의 다층적 서술시점은 문학도들의 교과서로 읽힐만큼 잘 쓰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난 문학도가 아니니까 내게 다가오는 작품 위주로 말하면 된다.
우화적인 작품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참마 죽>의 얼얼한 엔딩은 대단했다. 참마 죽을 무척 좋아하지만 먹을 수 있는 기회라고는 명절 때 입맛 다실 정도밖에 없어서 참마 죽을 배불리 먹는 걸 평생 소원으로 간직하고 있던 어느 하급 무사가, 심술 궃고 부유한 무사의 계략으로 한 솥 가득한 참마죽 앞에 선 뒤 식욕, 그리고 작은 소원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내용은, 라캉이 정신분석 수업에 텍스트로 쓰기에 딱 좋게 쓰여진 듯했다.
소름끼쳐서 두 번 읽었던 작품은 <게사와 모리토>. 모리토는 남자, 게사는 여자로 둘은 불륜 관계다. 작품은 둘의 한 차례 씩의 독백으로 진행된다. 모리토는 게사를 연모한 적이 있으나, 지금 와 돌아보면 그것이 사랑인지, 아니면 숫총각으로서 여성의 몸을 탐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게사는 그 사이 성실하고 착한 남성에게 시집을 갔고, 모리토는 3년이 지나 게사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모리토는 게사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연정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녀를 유혹했다. 그리고 역시 어찌된 일인지, 모리토는 게사의 귀에 대고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한다. 게사를 사랑하지도,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게사는 자신의 남편을 죽이러 오기로 한 모리토를 기다린다. 게사는 3년만에 만난 모리토에게 자신의 몸, 그리고 마음의 추함을 들켰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비 내리는 새벽녘 같은 적막함"에 떨던 게사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몸뚱이"를 모리토에게 맡긴다. 모리토의 즉흥적인 살인 계획에 게사가 동의한 이유를, 독자는 알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다. 게사는 모리토의 '미움', '멸시', '부정한 정욕'에 복수하고자 남편을 죽이겠다고 횡설수설한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덧없음, 맑은 물 속에 퍼지는 잉크처럼 마음을 어지럽히는 질투와 악의, 무엇 하나 의도대로 되지 않는 세계의 잔인함에 일종의 파국 선언을 하기 위한 살인일까.
아쿠타가와의 어머니는 아쿠타가와를 낳은 뒤 8개월만에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 이후 아쿠타가와는 외가에서 자라 좋은 교육을 받고 순식간에 당대 일본 문단을 사로잡은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아쿠타가와는 평생 정신병이 자신에게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살았고, 그 두려움은 실현됐다는 점을 <톱니바퀴> 같은 기괴한 작품에서 알 수 있다. 광인이 쓴 작품은 의사들의 텍스트는 될지언정 문학 독자의 흥미를 끌 수는 없겠으나, 광인의 경계에 선 작가의 작품은, '그 너머'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일상의 독자들에게 섬찟한 체험을 안겨준다.
아쿠타가와는 1927년 7월 24일 새벽,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이유로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음으로써 35년의 생을 마감했다. 아쿠타가와는 유전의 힘, 혹은 그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요절했으나, 후세의 독자들은 파괴되기 직전까지 과열됐던 그의 마음의 흔적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어쩌면 조금의 죄책감을 갖고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훗날 일본의 작가들은 아쿠타가와의 이름을 단 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여김으로써, 일본 문단 내 이름을 남기는 작가가 됐다는 징표를 얻게 됐다.
아쿠타가와 류스노케(1892~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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