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충성
에릭 펠턴 지음·윤영삼 옮김/문학동네/304쪽/1만5000원
여러 단계로 구성된 단테의 <신곡> 속 지옥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큰 죄인을 가둔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아홉 번째 지옥에는 불충한 자들이 모여있다.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예수를 배반한 유다 등이 이곳에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사탄의 이빨에 영원히 물어뜯긴다.
그러나 군대에서 거수경례할 때를 제외한다면, 이제 ‘충성’(loyalty)을 이야기한다는 건 고풍스러움을 넘어 촌스럽게 들린다. 텔레비전 사극에서조차 ‘퓨전 사극’ 바람 때문인지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아직 충성을 언급하는 세력이 있긴 하다. 우선 ‘국가에 대한 충성’이다. 한국에는 태극기를 들고 시청앞 광장을 점유하는 어르신들이 있고, 미국에서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충성에 대한 언급이 늘었다. 다른 하나는 ‘기업에 대한 충성’이다.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로 빚어진 애플사의 제품들은 전세계에서 ‘충성도’ 높은 고객을 보유하고 있기로 유명하다. 이들은 애플의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일단 산다. 다른 기업들은 충성스러운 소비자들을 거느린 애플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안달이다.
이것이 충성일까. 미국의 칼럼니스트 에릭 펠턴은 충성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인류가 가진 온갖 미덕의 선반에서도 가장 안쪽에 먼지가 쌓인 채로 놓여있던 충성의 가치를 21세기에 되살리자고 제안한다. 그렇다고 태극기나 성조기를 치켜들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 기업이 소비자의 충성을 높이기 위해 마케팅비를 쏟아붓는 모습을 긍정하는 건 아니다. 이런 모습은 오히려 충성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한다.
충성은 신뢰에 관한 미덕이다. 잡지 ‘에스콰이어’는 ‘누구나 마스터해야 하는 75가지 기술’ 중 하나로 충성을 꼽은 뒤, 이를 “아무런 기대 없이 주었을 때 가장 눈부신 보상으로 돌아오는” 원리로 설명했다. 금전적 이득, 권력 등 반대 급부를 기대하고 바치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다. 무조건, 때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비합리적이라 불러도 좋은 믿음의 관계가 충성이다.
안류의 번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미덕이었다면 미덕으로 칭송되지 않았을 것이다. 충성도 마찬가지다. 1953년 히말라야 산맥 K2에서 일어난 조난 사고는 충성이 사람을 살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산하던 미국 등반대 중 한 대원이 밧줄을 놓쳐 45도 경사면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와 함께 밧줄로 연결돼있던 4명의 대원도 밧줄에 끌려 절벽에 매달렸다. 밧줄 맨 위에 있던 대원은 다리를 쓰지 못하는 다른 대원을 업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초인적 힘을 발휘해 밧줄을 끌어당겼다. 밧줄 맨 아래 있는 대원은 눈보라 너머 45m 떨어진 곳에 있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맨 위의 대원은 그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3년 뒤, 에베레스트에서는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원정대는 각자 6만5000달러의 거금을 내고 산에 올랐지만, 서로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 등반대에 참여한 저널리스트 존 크라카우어는 정상 도전 전날 캠프에서 “함께 오르는 사람들과 아무런 유대도 느껴지지 않는다.(…) 몇 시간만 지나면 다시 함께 등반을 시작하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개인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우리를 이어주는 어떤 밧줄도, 조금이나마 서로에게 충실한 감정도 없이”라고 적었다. 이튿날 원정대는 정상 정복에 성공했지만, 하산 과정에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해병대는 “부상당하거나 죽은 동료를 남겨놓고 철수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켜오고 있다. 설령 부상당한 동료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더 큰 피해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철칙은 부대의 사기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미국 육군 대령으로 전역한 역사학자 사뮤엘 L A 마샬은 “사람들은 어떤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동료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싸운다”고 관찰했다.
충성은 가족에 대한 의무에서 출발한다. 철학자 조사이어 로이스는 “충성을 습득할 수 있는 최초의 자연스런 기회는 가족의 유대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어떤 충성의 기회와 사례 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정절과 헌신은 충성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존엄성을 최초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썼다. 가족에 대한 충성은 때로 다른 집단에 대한 충성과 충돌을 빚기도 한다.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같은 전체주의자들이 국가나 당의 대의를 위해 가족의 비행을 밀고하기를 부추긴 이유다. 자식이 부모를 규탄하는 모습은 대중이 전체주의 사회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풍경에 속한다.
허나 전체주의 독재자들의 전략은 충성의 딜레마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국가, 사회, 직장, 친구, 가족 등 동시에 여러 집단에 속해 살아가는데, 이들 집단이 필요로하는 충성이 서로 충돌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은 대함대를 이끌고 트로이 원정을 떠나려 했으나 거센 풍랑을 만나 곤경에 처했다. 점쟁이는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바치면 순풍을 만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가멤논은 그대로 따랐다. 가족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 중 후자를 따른 셈이다. 아가멤논은 전통적으로 동양의 정치인들에게 요구되온 가치인 ‘멸사봉공’을 따랐다고 볼 수 있지만, 그를 결단력있는 통치자라기보다는 비정하고 심지어 반인륜적인 인간이라고 느껴지는 마음을 극복하기 어렵다. 반대로 <대부>의 돈 콜레오네는 ‘가족’의 가치를 위해 충성했지만, 결국은 국가,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자일 뿐이다. 에릭 펠턴은 충성이 “타당한 범위 안에서 적용될 때에만 미덕일 수 있다”고 적었는데, 그 ‘타당한 범위’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충성의 가치가 가장 자주 언급되는 곳은 아마 정치 영역일 것이다. 한 여당 의원이 같은 당 중진 의원에게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이라는 둥, “앞으로도 형님께서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이라는 둥 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공개돼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펠턴은 “정치에서 충성은 과대평가된 덕목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악덕’”이라고 지적한다. 단적으로 리더는 추종자들의 충성을 기대하지만, 리더가 그 충성에 보답할 필요는 없다. 리더에겐 의리, 충성보다 의무, 책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펠턴은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을 비교한다. 우선 버락 오바마다. 그는 지지자들의 ‘충성과 사랑’을 받아 대통령이 됐지만, 차츰 친구, 조력자들에게 냉철하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마키아벨리적 인간’으로 변해갔다. 이것이 리더로서 바람직하고 효율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역으로 매력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리처드 닉슨과 그의 측근들은 충성심을 직원 기용의 첫번째 척도로 삼았다. 해당 분야의 최고 실력자라 해도 충성심이 없어 보이면 기용하지 않았다. 충성에 대한 닉슨의 강박은 차츰 심해져, 결국 세상을 ‘우리 대 그들’의 구도로 이해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의견이 다른 것과 충성심이 부족한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닉슨의 말로는 익히 알려진 바다.
그렇다면 정치 뿐 아니라 조직에서의 충성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펠턴은 “더이상 깨져서는 안 되는 조직의 근본적 토대로서 일정한 수준의 충성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충성을 “적절한 프로세스를 존중하는 헌신”이라고 부연설명한다. 어느 쪽이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되, 방향이 정해지면 이를 따른다는 약속이 충성이라는 것이다.
펠턴은 ‘국가에 대한 충성’ 역시 비슷한 논리로 푼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정부의 정책에 군말없이 따른다고 애국자는 아니다. 반역자라면 오히려 요란하게 충성맹세를 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위장할 것이다. 국가에 대해 충성하는 이는 국가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넘어,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 수치심을 느끼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
펠턴이 유행 지난 떠들석한 충성캠페인에 반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역시 세상의 여러 가치 중에서도 국가가 지닌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국가를 배신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원칙에 충성하는 사람이라고 확고하게 믿는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미군의 민간인 학살 내용이 담긴 군사기밀문서를 위키리크스에 유출한 브래들리 매닝, 미국 정보기관의 민간인 감찰 사실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분명한 반역자다. 펠턴은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 거만한 양심은 무기력한 양심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펠턴이 미국을 ‘정상 국가’라고 여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매닝이나 스노든은 모두 ‘거만한 양심’인 셈이다.
국가 권력이 여전히 강력한 한국에서 펠턴의 논리 전개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도 있겠다. 그러나 철지난 듯 보이는 충성을 ‘억지 의무’가 아니라 ‘행동을 북돋는 힘’으로 파악한 것은 새로운 통찰이다. 충성이 족벌주의, 부패, 음모, 이견에 대한 억압과 연루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하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속의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친구’에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충성은 “우리 삶의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인 덕목”이자 믿음, 우정, 사랑의 근원이다. 이 책은 배신당했을 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쿨’한 척 해야하고, “삶이라는 팽팽한 외줄”에서 걸을 때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충성이라는 오래되고 믿음직한 덕목을 돌려주자는 시도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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