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에 한 번 일요일 근무를 하고, 그 주는 금요일 휴무를 한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이렇게 3주에 한 번 있는 금요일은 아침에 아이가 유치원에 갔다가 올 때까지 온전히 나의 시간이다. 가끔 영화를 보고, 남는 시간엔 분리수거, 빨래, 청소 같은 집안일을 한다. 밀린 외고를 쓸 때도 있었고.
그런데 오늘은 마침 아이 유치원에서 1년에 한 번인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참관이 의무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이럴 때 의무를 느낀다. 난 2시까지 유치원에 가야했다.
오전엔 왕십리 아이맥스관에서 <그래비티>를 봤다. 무려 1만8000원. 여느 영화 두 편 값이다. 그나마 왕십리 아이맥스관은 인기가 좋아서 어제 예매했음해도 자리가 좋지 않았다. 영화는 내 예상만큼 감정을 움직이진 않았다. 그러나 감정은 움직이진 않았지만 감탄은 했다. 감탄의 대상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리함이다. 영화의 주요한 재능들이 브라운관으로 달려가고 있는 시대, 쿠아론은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을 다시 강조한다. 아무도 없는 우주 공간의 막막함, 그곳에서 느끼는 고독과 아름다움을 작은 화면으로 느끼긴 어렵다. 이것은 오직 캄캄하고 넓은 공간, 여러 사람이, 커다란 스크린 앞에서 감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만 다가오는 감동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시각을 넘어선 공감각적 체험을 요구한다. 그걸 스마트폰이나 모니터나 40인치 브라운관에서 느꼈다고 말하진 말라.
집에 들렀다 유치원에 가긴 애매한 시간이라 왕십리에서 원치 않는 점심을 먹고 잠실로 향했다. 백화점에 들어가 옷가게 사이를 거닐고, 지하에 내려가선 빵을 샀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석촌호수 주변을 걸었다. 돌계단에 앉아 호수 건너 롯데월드의 놀이기구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괜한 비명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석촌호수에 왔지만 삼전도비를 유심히 본 것도 처음이었다.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인 이 비석은 병자호란 패배후 청의 요구에 의해 조선이 세웠다고 한다. 찾아보니 어리석은 조선의 왕이 위대한 청의 황제에게 실수로 대들었음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설명에는 '굴욕의 역사' 운운하지만, 400년 다 된 일에 대해 그럴 필요 있나 싶다. 사정은 조금은 다르겠지만 갈리아, 게르만, 브리튼을 정복한 로마에게 프랑스, 독일, 영국이 지금까지 '굴욕'을 느낀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어차피 청 이전까지의 한족 왕조엔 충성을 맹세했던 한반도의 국가들 아니던가. 다만 왕의 명으로 이 글을 써야했던 문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참관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도 애매했다. 집에 들어가려니 잠깐 앉았다가 다시 유치원 버스를 맞이하러 나와야할 것 같았다. 프렌차이즈 카페에 가서 가장 싸면서도 내가 즐기는 '오늘의 커피 숏사이즈'를 시켰다. 별로 맛이 없었지만, 먹다 남은 커피를 굳이 들고 나왔다. 세탁소에 들러 옷을 찾고, 주민센터 앞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하교길의 중, 고교생이 많았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일없이 쏘다닌다. 북촌으로 인사동으로 남한산성으로 걸어다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속내를 드러내고 위선을 떤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 속에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오늘은 만추의 햇빛이 아름다웠고, 바람은 많이 불었다. 야외에 오래 앉아있으면 조금 쌀쌀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햇빛이라면 감수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날씨. 어떤 하루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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