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가끔 떼를 쓴다. 이유가 없어 보이고 들어주기도 힘든 떼다. 그럴 때 부모들이 자주 쓰는 방법이 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요즘 우리 아이도 이 말을 가끔 듣기 시작하는데, 난 솔직히 이 방식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며칠전 날씨가 좋아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한성백제문화제에 갔다. 백제 군인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음식 장터가 열리고,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쇼가 벌어졌다. 딱 지자체가 주최하는 지역 주민용 행사였으나, 아이는 그것마저도 신난 모양이었다. 하긴 집에 가봐야 매일 보는 장난감과 책 뿐이었으니까. "집에 가자"고 하자 아이는 "집에 안가"하고 찡그렸다. 주차장에 갈 때까지 내 그 소리였다.
참다 못한 아내가 차 안에서 그 말을 꺼냈다. "무서운 아저씨 온다!" 아이는 금세 얼굴색을 바꾸었다. "무서운 아저씨 어딨어요?" 아내는 아이가 말을 잘 들어서 다른데로 갔다고 말했다. 몇 분 후 아이는 다시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 어딨어요?" 아내는 같은 답을 반복했다. 아이는 5분전 자신이 집에 가기 싫어 징징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속마음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리 놀라거나 무서운 표정은 아니었다. 차라리 '무서운 아저씨'란 사람들이 있기나 한 것인지, 있다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궁금해하는 표정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상상 속의 '무서운 아저씨' 덕분에 귀가길은 편했다.
아이는 '무서운 아저씨'가 있기에 아무데서나 떼를 써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무서운 아저씨'가 있기에 잠을 자기 싫다고 억지를 쓰면 안되고, 아파트에서 뛰어선 안되고, 아이스크림을 2개씩 먹자고 졸라도 안된다는 걸 알아간다. 솟구치는 욕구에 마냥 응답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렇게 해서는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초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라든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초자아는 필요하다. 몇 해 전 어느 예능 토크쇼에서 유명한 가수를 본 적이 있다. 불혹이 넘은 나이였는데 초자아가 거의 형성되지 않았거나 너무나 약한 사람 같아 보여서 깜짝 놀랐다. 1시간이 채 안되는 토크쇼에서의 말로 한 사람을 온전히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측근도, 가족도, 심지어 팬도 아니기에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바 아니다. 그가 아이처럼 군다고 내가 피해를 입을 일도 없다. 게다가 예술가는 저 깊숙한 곳에 도사린 이드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때가 있는 족속들이다. 피카소나 파스빈더나 피츠제럴드가 엄격한 생활 태도, 위엄있는 인격으로 사랑받은 것은 아니다. 초자아가 있건 없건, 좋은 작품만 만들어달라. 그것이 멀찌감치서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나의 바람이다. 그 가수의 문제는 그의 음악이 더이상 들을만하지 않다는데 있을 뿐이다.
'무서운 아저씨'를 자주 호출하는 건 좋지 않겠지만, 아무튼 아이가 적당한 힘을 가진 초자아를 형성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만큼은 성숙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더 중요한게 있다. 너무 주눅들지 말기. 남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기. 그리고 때론 초자아를 속이거나 어르거나 협상하는, 그렇게 꾀많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이 사람들은 위의 글과 조금 관련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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